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37구간

머투리 2023. 9. 14. 07:53

    대구 5군수지원 사령부 앞에서 오후 9시 40분에 출발해 강원도 홍천군 내면 명개리 구룡령까지는 버스로 5시간 20분이 걸렸다.

   5군수지원 사령부에서 9시 40분에 출발한 산악회 버스는 대구를 동에서 서로 한 시간 동안 이동하면서 백두대간 원정 대원들을 태우느라 잠시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마지막 대원을 태우고 잠시 불을 껐다가 12시 안동휴게소에 들러 아침을 먹는다.

  대원들은 저마다 새벽의 백두대간 등반을 위하여 한밤중의 식사를 마다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면 산행대장은 오늘 산행의 코스와 주의할 점 등의 안내를 한다. 그러고 소등하지만 2시간여 후에 잠을 설칠 시간도 없이 버스는 구룡령 대간 들머리에 도착한다.

   백두대간 북진 37구간은 구룡령1,013m)-갈전곡봉(1,204m)-연가리골(샘터)-쇠나들이고개-조침령(586m)까지 21.1km 구간과 조침령-진동리 조침령 터널 관리사무소까지 1.5km 임도 구간이다.

    구룡령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상품 교역로이자 영동 사람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다.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룡이 승천하는 모양처럼 구불구불해서 붙었다는 설도 있다. 도로 구룡령은 일제강점기 이곳의 철광석 등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 징용해 만든 도로라고 한다.

56번국도(철원-양양)위의 구룡령에서 간단한 기념사진을 찍고 ‘열쪙’을 외치며 백두대간 37구간을 시작한다. 이정목이 있는 들머리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누구 기준인지는 모르지만, 들머리 이정목에는 조침령 21km(10시간), 진고개 22km(11시간 40분)이 걸린다고 적혀 있다.
멀리 사라지는 선두대원들의 불빛을 쫓는 발자국 소리와 가쁜 숨소리는 마치 전쟁에 임하는 병사 같다.
 
"이번 37구간은 초반의 갈전곡봉까지 오르고 나면 마무 의미 없는 20여개의 오르내림을 하는 구간입니다.“
백두대간에 의미 없는 구간이 있겠냐마는 강원도 백두대간 구간 가운데 가장 온화한 구간이라는 설명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러고 보니 구룡령-조침령 구간 능선 어디에도 이름난 산은 없다. 보통 대간은 큰 산을 품고 형성돼 있는데, 22km 구간 내내 '이름난 산'이 없다는 게 특이하다. 그만큼 산길도 평온할 거라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구룡령을 출발한지 20여분 넓은 공터가 나온다. 구룡령 옛길(1,089m)이다. 영동 북부지역인 양양군 서면과 영서 내륙지역인 홍천군 내면을 잇던 진짜 구룡령이다.


옛 구룡령


동해에서 각종해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 홍천군 내면으로 전해졌고, 홍천 시장에서 나온 콩이나 수수, 녹두 따위의 곡물이 이 고개를 넘어 양양과 고성의 갯마을로 갔다.

   그 오랜 세월의 내력을 잊지 못해 양양과 홍천 사람들은 지금도 곡물과 해산물을 바꾸기 위해서 넘던 고개라고 ‘바꾸미 고개’ 라 부른다고 한다.

   대간길은 오름 내림을 반복하며 고도를 높인다. 새벽 3시경에 시작된 대간길은 칠흙 같이 어둡다.

  그러나 고개를 들면 아름드리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육중한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
보통 높은 산정은 세찬 바람 때문에 잘 견디지 못하는데 백두대간의 기백을 말하는 듯 나무들은 육중하게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모양새다. 가끔씩 돌계단이 나타나지만 잘 정비된 대간길은 여유롭다.

   갈전곡봉2.4km 이정표를 지나면서 길은 좌측 급경사 내리막이다, 그리고 잠시 평탄한길을 지나 무명봉에서 잠시 내려오니 갈전 약수터 갈림길이다.

   대간길은 직진이고, 우측방향은 약수터방향이다, 로프 시설물이 있는 가판른 오르막길을 올라서니 갈전곡봉이다. 구룡령을 출발한지 1시간30여분 만에 갈전곡봉에 닿는다.

스테인레스로 된 갈전곡봉 정상석

   갈전곡봉(葛田谷峯,1,204m)은 갈은 칡葛, 전은 밭田 즉 갈전은 ‘칡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양양 내면 방향 산 아래 마을 이름이 갈전리(갈천리) 이다. 산골마을에 식량이 부족하여 칡으로 연명하느라 개울이 칡을 씻은 물로 가득했다 해서 갈전리(갈천리)라고 불린단다. 갈전곡봉은 소양강의 지류인 방태천을 비롯하여 계방천, 내린천의 발원지다.

   갈전곡봉 정상석은 돌이 아니라 스테인리스재질이다. 대간길의 거창한 정상석을 많이 보다가 돌이 아닌 금속 재질의 조그마한 정상석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아직도 어두우므로 서로의 랜턴 불빛에 의지해 정상석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다.
갈전곡봉의 이정표는 조침령 16.5km, 구룡령 3.6km 로 적혀있다. 이번 구간의 이정표는 약 2km 거리마다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소수점 까지 깨알 같이 적혀있다. 특징 없는 대간길에 이정표를 자주 만나 지루하지 않다.
 
갈전곡봉에서 조침령 이정목을 따라 우측으로 내려선다. 잠시 내렸다가 편안한 길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가파른 내리막이 길게 이어진다. 갈전곡봉 오름길보다 더 길고 가파른 돌계단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통나무 벤치가 있는 대간 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목을 축인다.

대간 능선의 아침일출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아침의 일출은 언제나 기운이 넘친다. 일출의 붉은 기운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힘을 불어 넣는다.

    안부를 지나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 지나니 로프가 긴 통나무 계단을 내려가니 왕승골(이정목에는 왕생골이라 적혀 있다.) 갈림길이다. 양양의 도로명 주소에 ‘왕생골 1102’이라는 도로명 주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왕생골이 맞다.

왕생골 이정목

   오른쪽은 양양의 왕생골이며 왼쪽은 인제의 조경동이다. 왕생골 골짜기를 내려가면 양양군 서면 갈천리 왕승동이 있는데, 마을 곳곳에 신라 마의태자의 왕궁터로 추측되는 커다란 무덤이 있어서 왕승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조경동은 아침가리의 한자말이다.
 
   왕생골 갈림길을 지나니 부침이 한결 누그러진다. 길은 넓고 평탄하다. 아침햇살은 숲의 깊은 곳까지 비춘다.
  
   한선생님이 걸음을 멈추어 어디를 가리킨다. 가리키는 곳에는 노루궁뎅이 버섯이 나무에 붙어 있다. 내려가서 얼른 채취하여 온다. 버섯은 향이 있고 만져보니 부드럽다.
 
   능선 쉼터에서 대원들과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지난다. 혹시나 노루궁뎅이가 보일까 시선이 자꾸 숲으로 향한다. 그러나 노루궁뎅이는 커녕 독버섯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이 좋은 봉우리나 기암괴석을 마주하면 긴 산행의 고단함이 씻은 듯 없어진다. 반면 기암괴석이나 뛰어난 조망이 없는 산은 지루하다. 특별한 조망이 없이 끝없이 오름내림이 반복되지만 몸이 쳐지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없다.

부드러운 대간길


   산길은 부드럽고 오르내림이 반복되지만 오름과 내림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육중한 뿌리는 내리고 서 있는 나무들은 맑은 공기를 내뿜는다.

연가리골


  연가리골 샘터에 도착했다. 능선에서 100m만 내려가면 샘터가 있다고 한다. 샘터가 궁금하지만 지나친다. 식수를 충분히 가져왔기 때문에 가볼 필요가 없다.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할 때 받은 종주계획표에는 듣도 보도 못한 지명들로 온통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낯선 지명과 고개이름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늘 그렇듯 그 낯선 지명들의 유래가 궁금했다. 그 낯선 지명들의 유래를 시군 홈페이지에서, 백과사전에서,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찾아보고 또 찾아보았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3둔 4가리의 둔(屯)은 산기슭의 펑퍼짐한 땅을 말하고, 사람이 몇 명이 은둔해 살 수 있는 곳의 의미란다. 가리는 화전을 일구어 한나절 밭갈이 할 만한 좁은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연가리는 오지의 대명사인 ‘3둔(屯) 4가리(耕)’ 중 하나이다. 살둔(生屯), 달둔(達屯), 월둔(月屯) 등 3둔은 홍천군 내면에 의 옛 지명이고 4가리중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는 인제군 기린면에 , 명지거리는 홍천군 내면에 속하는 옛 지명인 듯하다. 참고로 위의 지명은 홍천군과 인제군에는 없다.

  정감록에서 난을 피할 곳으로 꼽던 오지중의 오지였던 그곳에 포장도로가 생기고 사람들이 드나들기 좋은 곳으로 변하였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물은 바닥의 돌이 훤히 보이는 맑디맑은 계곡으로 3둔 4가리는 사람들의 피서지로 변하였다.

  연가리골에서 특색이 없지만 잘 정비된 등산로는 거기가 거기인 듯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연가리골에서 2시간 작은미아치골에 닿는다.

이런길을 연속해서 지난다



   대간 일행들과는 걸음이 맞지 않는다. 나는 오르막은 비교적 쉽게 오르는데 내리막에는 내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보니 늦다. 그래서 오르막에는 앞의 산 꾼이 거치적거리고 내리막에서는 길을 내어 줘야 한다.

  긴 오르막이 이어진다. 같이 오던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조침령까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듯하여 속도를 내어 본다. 평지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은 뛰기도 하면서 계속 걷는다.

작은미아치골을 지나 조침령 2.6km를 앞두고 쇠나드리 갈림길이 나오고 이어서 바람불이 갈림길이다. 쇠나드리는 조침령 도로가 생기기 전에 소로로 넘던 옛 조침령이다.
아까 내리막에서 나를 추월해 가던 젊은 산객을 추월한다.
'쇠나드리'는 소를 방목하였다고 해서 쇠나드리라고 하며, '부람불이'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소가 날아갔다'고 해서 부르는 지명이다. 그렇지만 지명의 유래가 제각각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이름들이 정겹고 살갑다.


   여름방학이었다.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사과밭에 창고와 농막을 지어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여름방학동안 나는 시내에 나가 시멘트와 블록과 슬레이트를 사와서 농막을 짓기 시작했다.

  미장일은 친척에게 부탁을 하고 필요한 건축자재를 구해왔다. 블록을 쌓기 위해 실로 줄을 쳤으며 기둥과 서까래에 쓸 나무를 산에서 베어 왔다.

  줄을 매어 경계를 표시하고 거기에 맞춰 블록을 쌓았다. 블록을 쌓은 후 블록위에 서까래를 올려 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슬레이트를 얹어 지붕을 완성했다.

  안쪽 블록은 벽지를 바르기 위해 시멘트 미장을 했다. 미장은 동네에 미장기술을 가진 아는 형님께 부탁을 했다. 난방을 하기위해 구들을 놓았는데 구들장은 집 앞 냇가의 청석을 떼어 내어 사용했다.

   구들장 작업은 삼촌께서 해 주셨다. 드디어 구들이 완성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을 지핀지 한참 만에 방바닥이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연기가 잘 빠지며 난방이 잘 되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어머니를 불러 와서 따뜻해진 방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구둘 목에 손을 넣었다.

  방바닥이 따뜻한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처음으로 나에게 잘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따뜻해진 방에 등을 대고 누워 따뜻하게 지내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한없이 행복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정신없이 보내고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은 나락으로 떨어 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지만 그렇게 많이 떨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환은 날로 깊어져 갔다. 농사일은 더욱 많아졌으며 더욱 힘겨워졌다. 떨어진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은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향기가 배어 있는 편지를 뜯어보니 뜻밖의 소식이 나를 놀라게 했다.

to 욱이
잘 지내니?

  한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해.
어느덧 2학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
2학년 마치면 우리 집 대구로 이사 간다.
오빠 공부 때문에 대구로 간대
나도 대구로 전학시켜준대
욱이 언제나 잘 지내고 열심히 공부해
언제 볼 날이 있겠지
안녕

   은자는 오빠와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은자아버지가 대구에 취직하고 아이들은 모두 대구의 학교로 전학 간다는 것이다.

  은자 아버지는 아버지와 동갑이신데 아버지처럼 교육열이 대단하신분이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병 때문에 아이들을 유학시키고 싶어도 처지가 못 되었다. 은자나 은자 오빠가 한없이 부러웠다.
  
  은자를 못 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사 가서도 편지를 쓸 것이며 은자 너도 답장을 꼭 해달라는 것과 먼 훗날 서로 잊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으며 우리 더욱 힘내서 공부하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중3 새 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장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한다. 누구하나 상담할 사람도 없다. 친척들은 학교 그만두고 농사일을 하라고만 하신다. 그 말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에게 책임은 더 무거워 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더 많은 일을 요구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공부에 대한 부담이 더 커졌다. 또한 동생들의 공부도 챙겨야 했다. 학교 다니기 싫다고 하는 동생을 다독여 학교에 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병환은 더 깊어만 갔다.
갑자기 은자가 보고 싶어 졌다. 은자가 대구로 이사 간지가 벌써 100일 지났다.

은자 잘 있니?
  대구로 이사 간지 4개월이 다되어가는 구나.
전학 가서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니?
  좀 있으면 은자와 처음 만났던 아카시아 나무에는 아카시아 꽃이 아름답게 필거야
거긴 아카시아 꽃을 볼 수 없을 테지?
지난 일들은 모두 아름다운거야
   우리의 지난 일들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야
  친구 원호, 병식, 정오, 춘자 모두 잘 지내고 있어
  기약은 할 수 없지만 언제 만날 수 있겠지. 답장주기 바란다.

  은자에게 편지를 보낸 지 몇 달이 지났지만 답장이 없었다. 전화번호나 연락 할 주소도 없었다.
  전화기는 동네에 한데가 겨우 있을 때이다.
그렇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는 바람에 나는 은자를 잊고 있었다.

조침령 임도 철문

  조침령 임도와 만나는 지점은 특이하게 철문이 있다. 가축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산돼지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한 시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철책을 내려서면 1980년 공병부대가 조침령 옛길 대신 개설한 임도가 나 있다.

  철문을 넘어 우측으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군이 설치한 구 조침령 표지석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새로 세운 커다란 조침령 표지석이 나온다.

조침령 표지석


   조침은 "산이 높고 험하여 새가 하루에 넘지 못하고 잠을 자고 넘었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이라고 전해진다.

   울산의 모 산악회 대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얼른 가서 단체사진을 찍어주고 인증사진을 부탁한다.

   표지석 앞으로 다음 38구간인 조침령 단목령 들머리가 긴 나무 계단을 드러내고 있다.
표지석에서 인증을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1.5km의 접속구간을 내려서야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진동리이다.

   나무그늘이 없는 긴 임도를 내려가니 발바닥이 아프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며 내려가니 q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진동리에 닿는다(11시 40분).
  
   도로 건너 앞은 방태천 상류이다. 제법 넓고 수량이 풍부한 계곡물에 몸을 담근다. 온몸이 날아갈 것 같이 시원하다.
  가져온 여벌옷으로 갈아입고 버스로 되돌아와 선두 대원들이 준비한 김치전과 청도 미나리를 곁들인 삼겹살로 푸짐하게 하산식을 먹고 버스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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