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 35구간

머투리 2023. 8. 17. 08:18

 

백두대간 북진종주35구간
산행일자2023년 8월 12일(토요일)∼13일(일요일)
산행코스대관령-선자령-매봉-소황병산-노인봉-진고개
도상거리23.6km
실제거리24.7km
산행시간9시간10분(휴식시간포함)

    드림산악회 백두대간 북진종주 35구간은 대관령(832m), 선자령(1,175m), 곤신봉(1,131m), 매봉(1,173m), 바람의 언덕1,329m), 소황병산(1,328m), 노인봉(1,338m), 진고개(1,072m)에 이르는 거리가 24.7km인 구간이다.
  
   걸어 오르지 않았어도 한참을 쉬었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고갯마루 대관령에 섰다. 헤아려 보지 않고도 “아흔아홉구비”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험준한 고개이다.
영서와 영동이라는 이름도 이 고개를 기준으로 만들어 졌고, ‘관동‘ 이라는 말도 이 고개의 동쪽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운 관동별곡의 ’관동‘도 이 고개의 동쪽이라는  말이겠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산줄기는 한반도의 등허리를 따라 내려오다가 설악산, 노인봉, 황병산, 능경봉, 고루포기산을 넘어 지리산으로 이어지는데 황병산과 능경봉의 험준한 산악지대는 동과 서를 서로 갈라놓았다.

   황병산과 능경봉 사이의 잘록한 곳에 대관령 고개를 만들고 서울과 내왕을 했지만 대관령은 워낙 험준한 고개이다 보니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의 내왕이 거의 없다보니 대관령을 기준으로 대관령의 서쪽 영서와 대관령의 동쪽 영동은 풍속, 언어 등 사람 사는 모양새가 많이 다르다..

   2시 35분 대관령 휴게소 뒤쪽의 “大關嶺國師城隍堂 入口“ 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바위 표지석 오른쪽 산길로 접어든다.

   한여름임에도 대관령의 새벽의 공기는 차다. 바람한 점 없는 대간길이지만 지나가는 속도에 의해서 바람이 만들어져 시원하다. 한여름의 새벽은 지표면의 식은 찬 공기와 대기의 더운 공기가 만나 짙은 안개를 만들어 낸다. 헤드랜턴의 불빛은 짙은 안개와 부딪혀 멀리가지 못하고 자꾸만 사그라들어 길이 잘보이지 않는다 . 어둠속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자꾸만 늦어진다.

후레쉬 불빛도 안개속에 잠긴다


  안개가 앞을 가리지만 대간 꾼들의 발걸음을 붙잡지 못하는 듯 어느새 분주하던 발걸음은 사라지고 적막하기만 하다.
   이제 영희 후배님과 둘만 남았다. 앞선 대원들과 멀어지지 않으려고 안감 힘을 쓰며 걷는다. 사방은 칠흑 같이 어둡고 동쪽에 뜬 외로운 그믐달만이 우리가 북쪽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이렇게 확신이 없는 대간 길을 새봉 갈림길로 짐작되는 갈림길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들려 우리 대원이 새봉에 들렀다가 뒤따라오는 줄 알고 반갑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낯선 분들이다.
   가방에 붙어있는 리본을 보니 대구 k2 백두대간 대원들이다. k2 산악회 백두대간 팀은 지난 30구간에서 부터 줄 곧 만나 왔던 분들이라 낯이 익은 대원들도 있다.
k2대원들을 만나니 무엇보다 길을 잃지 않고 걷고 있다는 것에 그간 졸였던 마음이 놓인다. 대원들을 따라 걷는 것도 잠시 사위는 또 다시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만 들린다.

  그렇게 걷기를 30여분 어둠속에서 풍력 발전기 소리가 들리고 앞에서 사람소리가 들린다. 선자령이다, 아직 사위(四圍)는 어둡다. 선자령에서 드디어 문대장을 비롯한 후미와 합류했다.
 
선자령은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이다. 선자령(仙子嶺:1,175m)은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선녀가 자식과 함께 내려와 목욕을 하며 노니 던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단다.

  대관령에서 6km 가량 이어나간 선자령의 산세는 북동풍을 타고 강원 동해로 유입된 공기는 다량의 바다 수증기를 머금은 채 이동하다가 해발고도가 900m를 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만나 강제로 상승하면서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눈구름대가 발달해 많은 눈을 뿌리게 된다.
   대관령에서 선자령에 이르는 능선은 거칠 것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언덕에 매몰차게 몰아치는 바람결에 실려 온 눈이 환상적인 경관을 마련해 준다,
그래서 선자령은 겨울산이다. 선자령은 해발이 1,157m로 높지만 대관령 휴게소에서 표고차가 317m밖에 되지 않고 긴 능선으로 이어져서 뒷동산을 오르는 기분으로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선자령은 넓은 초원과 동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어 해돋이의 명소이다. 겨울철에는 고루포기산(1,238m)에서 능경봉(1,223m)과 매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호쾌한 능선을 조망할 수 있다. 거기다가 운이 좋으면 구름너머로 보이는 풍력발전기의 이국적인 모습도 볼 수 있다.
 
   02시 35분에 시작된 우리 백두대간 북진 종주 팀은 선자령의 이국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선자령을 지나자 새벽의 여명이 밝아온다.

  조심스럽게 내딛던 대간길에 여명이 밝아온다. 이제 랜턴 불빛도 필요 없어졌다.

  선자령을 지나 산등성이를 다라 삼양 목장 사이로 구불텅 넓은 임도가 열려 있다, 대관령을 출발한지 2시간 10분만에 곤신봉에 닿는다. 앞서가던 대원들은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으로 광활한 초원이 펼쳐지고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구름속에 갇혀 있다. 오른쪽 동해바다 쪽 에서는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태양은 떠오르기 전에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 장엄한 기운도 떠오르기 전에 볼 수 있다.

  

바람개비가 떠보이는 것은 빛의 굴절 때문이다.


   구름위로 솟구치는 태양도 실낱같을 때 가장 선명하다.

   넓은 초원위로 구름이 휘감기고 구름 속에 갇힌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천상의 풍경을 자아낸다. 우리 대간 대원들은 잠시 하늘위에 섰다. 이슬을 머금은 초원은 싱그럽고 아침 공기는 서늘하여 상쾌하다. 천상의 풍경을 한참을 바라보며 백두대간의 힘든 여정을 잊는다.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촬영지를 지나면 왼쪽으로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은 밀크하우스 대피소와 동해 전망대가 있다. 대피소에 들어가 간식과 아침을 먹는다. 대피소는 7-8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추운 겨울에 이 대피소는 요긴하게 쓰일 것 같다. 바깥의 서늘한 바람을 막아주어 춥지 않다. 한여름의 찜통더위에 추위를 걱정해야하니 이것 또한 백두대간을 꾼들의 호사가 아니던가.

   대피소를 나와 동해전망대에 올라보지만 동해 바다까지의 방금 떠오른 해와 구름에 가려 조망은 거의 없다.

구름속의 초원


  이렇게 이국적인 초원지대와 구름속의 풍력발전기를 바라보며 걸으니 매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잡목지대를 지나 조금 오르니 매봉을 산악회 회원들이 점령하여 아침 식사중이다.

   사람들이 앉은 자리를 조심스럽게 비켜가서 매봉정상석의 사진만 얼른 찍고 내려온다.

매봉을 지키기 위해서 돌에 글자를 적었다


  
  소황병산 출입금지 목책을 넘어서니 물소리가 들리더니 물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대간길 바로 가까이에 제법 많은 수량의 계곡과 폭포가 있다. 잠시 폭포를 감상하고 숲을 걸으니 키 작은 잡목들의 나뭇가지가 갈 길 바쁜 산객을 잡아당긴다.

  이리저리 헤집고 지나니 다시 삼양목장의 푸른 초원이 나오고 초원지대의 가장자리를 따라 길이 있다. 길이라기보다 백두대간의 산 꾼들의 발자국에 풀이 누워있다.

  왼쪽으로 저 멀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이고 곧이어 초소 앞의 철조망을 넘어서니 길은 계속 편안한 숲길이 이어진다.
 
  몰래 집을 나서 탱자나무 길을 지나 은자의 집 앞에 다다랐다. 집안에는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났다. 안채의 대청마루에는 호롱불이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은자와 은자동생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들어가니 은자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멈칫거리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대청마루 안으로들어 갔다. 삶은 감자 냄새가 났다. 감자가 담긴 그릇을 내밀며 먹으라고 권한다. 감자 한 조각을 베어 물면서 겨우 한마디 한다.
“니도 같이 먹자“
감자를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해보지만 어색하다. 은자는 나를 개의치 않는지 동생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깔깔깔 웃는다. 은자와 은자동생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떡여 공감의 표시만 할뿐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친구○○는 누굴 만났다더라는 둥의 이야기로 나를 이야기 마당으로 끌어 드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나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서로의 동갑내기 친구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사랑채에서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은자의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누가 왔노“ 하며 사랑채에서 문밖으로 나오셔서 뚜벅뚜벅 걸어오셨다.
순간 뒤안으로 몸을 숨겼지만 할아버지는 성큼 대청마루 까지 오셨다.
 
어린 시절 은자의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약밥을 주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약밥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손가락에 침을 묻혀 아이들에게 먹이는 일이었다. 은자의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약밥을 주겠다고 손가락을 치켜들고 따라오면 기겁을 하고 아이들이 도망을 갔다.
 
순간 들켰다는 생각에 뒤안의 담을 넘어 달음박질을 쳤다. 뛰쳐나오면서 미쳐 신발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나왔다. 신발이 한 켤레 밖에 없는 나로서는 난감하였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른 새벽에 은자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아내었는지 내 신발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발을 받은 아버지는 말없이 내 신발을 방 앞에 던져 주셨다.
어느덧 중2가 되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나를 쫓아 다녔다. 멀리 날아가다가 추락하는 꿈을 꾸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악당들한테 쫓기다가 깨는 꿈을 꾸기도 했다.
동네 형들이 멀리 도회지로 유학을 가는 것을 부러워했다. 그렇지만 어떤 성적으로, 또한 어떤 방법으로 진학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늘 다짐했다. 공부를 한다고 어떤 때는 밤을 새기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늘 시간만 나면 일을 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날로 병세가 깊어만 갔다. 학교에 가기위해 집을 나설 때와 집에 돌아올 때는 늘 사랑방 앞에서 아버지께 인사하였다.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 늘 눈물이 났다. 아버지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자 어머니는 어디서 들었는지 푸닥거리를 하겠다고 무당을 불러오셨다.
무당이라는 분은 도무지 무당 같지 않고 이웃집 아주머니와 같았다. 어머니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무당은 멀방으로 보자기를 들고 들어갔다. 한참 만에 방에서 나오는 무당은 아까와 다른 눈이 무서운 화장을 하고 나왔다.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흰색 두루마기에 붉은 색 장삼을 입고, 치렁치렁 끈이 달린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에 푸닥거리는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사랑방에서 북을 무언가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무당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으며 단호했고 눈빛은 무서웠다. 아버지의 머리맡에 무섭게 칼을 휘두르며 주술을 외워댔다.
우리 조상님 중에 원한을 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던 귀신을 쫓는다며 때로는 귀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무당의 목소리를 내며 귀신과 대화하듯 주술을 외우며 부디 이제 화를 거두고 멀리 가라는 주술을 외웠다.
어머니와 이웃 친척 아주머니들은 연신 무당을 향해 손을 비벼 댔다. 나는 무당의 주술 따위는 거짓이이라고 여겼다. 무당은 대나무 가지를 휘두르며 아버지를 때리기도 하고 때로는 쓸어내리는 흉내를 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손을 하늘높이 올려 손바닥을 비비며 무언가를 말씀하셨다.
새벽녘이 되자 무당은 나를 마당으로 불러내었다. 구천에 떠도는 원한 많은 조상귀신을 달래야 한다며 절을 하게 했다. 큰절을 하고나면 또다시 큰절을 하라고 명령했다. 절을 하고 있는 나에게 대나무 가지로 내려치기도 하고, 쓸어내리기도 했다. 무당은 나에게 대나무 가지를 쥐어주고는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무당의 차림과 주술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대나무를 쥐고 있는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술이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무당은 더욱 큰 목소리로 ‘귀신아 물러나라’고 외쳤다. 무당은 마당에 부엌칼을 던져 꽂고 그 위에 바가지를 엎어 씌웠다.
그러고는 나에게 마당으로 내려가 대문을 보고 절을 하라고 시켰다. 초저녁에 시작된 푸닥거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후 마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사람들은 무당이 원한이 많은 조상귀신을 알아내었다고 용한 무당이라고 하며 귀신을 쫓아내었으니 아버지의 병이 나을 거라고 확신했다.


  폭포이후 부터 지금까지 줄곧 혼자 걷고 있다. 지금 대간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지 혹시나 대간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이렇게 한 시간 남짓 걷는데 멀리 사람들의 소리가 왁자지껄 들린다.

  바위 전망대에 올라서자 멀리 봉우리가 보인다. 잠시 물을 마시고 쉬고 있는데 산객 한분이 지나간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소황병산 이지요?’ 그 산객은 나를 한참 보더니
‘소황병산은 한참 전에 지났는데 저기 보이는 봉우리는 노인 봉입니다.’

   아뿔싸, 소황병산을 지나쳤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 했던가. 초소의 철조망을 지나기 전에 왼쪽의 초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던 곳이 소황병산 이였음을 이재야 알아채었다.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초지를 관리하는 인부인줄 알았다.
  
  어차피 소항병산은 대간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지 않는가. 또한 인중지도 아니고 조망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초원을 지나면서 충분히 조망을 봤지 않았던가하고 위로해 본다.

   백두대간에서 비탐구간은 종주를 하는 사람들에게 늘 마음의 부담을 준다. 백두대간은 계속 이어가는 것인데 비탐구간 때문에 대간을 이어 갈수 없게 된다.
   백두대간을 계속 이어가지 위해서는 비탐구간을 지나야 하는데 법을 어긴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또한 오늘 같이 비 법정구간은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길을 찾는데 애를 먹는다.

   매봉에서 노인봉까지의 비탐구간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노인봉 바위 전망대에서 잠시 걸으니 노인봉 정상 바로아래 우회도로가 나온다. 우회도로를 따라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무인 대피소가 나오고, 목책을 넘어 무인대피소 앞을 지나니 노인봉 삼거리가 나온다.

  들머리 대관령을 출발한지 8시간 만에 노인봉 정상에 닿는다. 정상에는 국립공원의 봉우리답게 제법 많은 산객으로 시끌벅적하다,

노인봉 정상에서


   노인봉은 정상에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노인 봉이라 불렀다 한다.

  노인 봉에서 인증을 하고 조심스럽게 바위 슬랩(slab)을 내려와 노인봉 삼거리에 닿으니 뒤따라오던 영희 후배님이 숨 가쁘게 올라오고 있다.

  여기서부터 4.1km를 내려가면 진고개 휴게소이다. 잘 정비된 길을 따라 내려가니 많은 산객들이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고 있다. 11시 40분 진고개 휴게소에 닿는다. 공중화장실이라고 쓰인 곳으로 따라 갔더니 여자 화장실이다.
  
   삶은 강냉이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남자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으니 건물 왼쪽에 있다고 가리켜주며
‘신발을 씻으면 안 돼요’ 한다.
화장실내부는 방금 물로 씻은 듯 깨끗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머리를 감고 얼굴을 닦고 있는데 뒤에서

  ‘어르신 모자가 떨어져 있네요.’ 한다.
  뒤돌아보니 왠 중늙은이가 나를 쳐다보며 모자가 떨어진 곳을 가리키고 있다.

  난 60을 훌쩍 넘긴 나이 임에도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정말 싫다. 지금같이 지나가는 사람이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쓸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마트나 병원에서 직원이 ‘어르신‘ 이라고 부르면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럼에도 어르신이라고 부르면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는다.

어르신 혹은 아버님이라는 호칭은 정말 듣기 싫다. 나이 먹었다고 존경을 받고 싶지는 않다. 노력 없이도 나이는 먹게 되어 있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존경의 의미가 아니다. 존경하지 않으면서 아무렇게나 늙은 사람을 쉽게 부르는 것이다.

  얼마 전에 전철 안에서 흉기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린 한 여성이 뉴스에 나왔었다. 그 여성은 ‘아줌마’라고 불러 화가 났다고 한다.

  중년여성은 ‘아줌마’라고 하면 왠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하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또한 요즈음은 ‘아줌마’는 제3의 성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그러니 중년 여성의 호칭으로 ‘아줌마’는 적절치 않다.
 
  불교에서는 오랫동안 신자들 사이의 호칭을 남자 신도는 ○○거사(巨師:속가에 머물고 있지만 도를 이룬 큰 선생님), 여자신도는 ‘○○보살님’이라는 호칭을 써서 서로 거북함이 없다.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성도님‘이라 호칭하며 직책을 가진 상대방을 부를 때는 ’○○집사님‘(권사님, 장로님)이라 호칭하여 서로 거북함이 없다.

  고객을 친밀하게 대하려고 직원이 고객을 ‘언니’ 나 ‘어머님, 아버님’으로 호칭하는 것보다 성별에 관계없이 ‘손님’이나 ‘고객님‘, ’회원님‘ 이라 부르는 것이 거부감이 없다.

  반대로 손님이 직원을 부를 때는 ’여기요‘ ’아주머니‘ ’아저씨‘ 보다 ’사장님‘, 이나 ’매니저님‘ ’간호사님‘ ’○○선생님‘ 이라 부르는 것이 거부감이 없다.

  나는 ‘어르신’, ‘아버님‘ 이라 불리는 것이 정말 싫다.   차라리 ’할아버지‘가 낫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이 섞여 있는 동호회에서 나이든 사람의 호칭으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적극 권한다.

  선생님은 일반적으로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선생은 부르는 사람이나 불리는 것을 어색하게 받아 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선생(先生)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을 존대하여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중년이 넘은 사람은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면 좋겠다. 연배가 높은 사람에게는 ’○○선생님‘ 연배가 낮은 사람에게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적극 권장한다.

‘○○사장’, ‘○○사장님’, ‘○○선생’,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좋다.
  
  화장실에서 나와 버스를 탄다.  일본 북알프스를 다녀오신 회원6분이 한턱내는 소머리국밥에 맥주를 곁들인 수육을 맛나게 먹고 진우막내가 내는 부라보콘으로 입가심을 하고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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