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30구간

머투리 2023. 6. 13. 22:53
백두대간 북진종주30구간
산행일자2023년 6월 11일(일요일)
산행코스화방재-수리봉-만항재-함백산-중함백-은대봉-두문동재-금대봉-매봉산-삼수령
도상거리21.5km
실제거리24km
산행시간9시간500분(휴식시간포함)

 
  백두대간 30구간은 화방재(959m), 수리봉(1,214m), 만항재(1,330m), 함백산(1,572m), 중함백(1,505m), 은대봉(상함백;1,442m), 두문동재(1,268m), 금대봉(1,428m), 수아밭령(1,117m), 비단봉(1,281m), 매봉산(1,303m), 피재(삼수령;943m)를 잇는 구간이다.
  대구드림산악회 백두대간 원정대를 태운 버스가 화방재에 도착한 시간은 03시다.
  화방재라는 이름이 생긴 연유를 태백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화방재(花房嶺)는 원래 하방재였다. 먼 고개라는 뜻의 멀遐(하)에 방향을 뜻하는 모方(방)을 써서 하방(遐方)재라고 부르다가 “하비아재”라 하였고 일제 때 행정명칭을 한자로 하면서 지금과 같이 화방재(花房嶺)로 부르게 되었고, 한자에 걸맞게 참꽃이 만발한 고개로 된 것이다.》-태백시-
  버스에서 내린 드림산악회 백두대간 종주 대원들은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가볍게 몸을 푼 후 기념사진을 찍고 백두대간 북진종주 30구간을 시작한다.
  화방재를 출발한지 40여분만에 수리봉(1,214m)정상이다. 수리봉을 지나 한동안 오르막이 계속되고 힘겹게 오르면 군부대가 나오고 철조망을 따라 정문 쪽으로 돌아가면 콘크리트길이 연결되고 헬기장을 지나 만항재에 닿는다.

만항재 표지석


    만항재는 대한민국에서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라고 위키 백과에 소개되어 있다. 또한 만항재는 조선 건국을 반대하며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고려유신들이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이곳 만항에서 소원을 빌었다고 해서 ‘망향‘이라 불리다가 후에 ’망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화방재를 출발한지 2시간여 함백산 기원단에 닿는다. 아마도 여기서 함백산 정상을 향하여기우제나 기타 기원제를 올린 곳이리라 짐작된다.
  함백산 기원단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30여분 만에 함백산(1,572) 정상이다. 여기가 남한에서 여섯 번째 높은 산임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함백산 정상석


  함백산에서 보면 동쪽으로 매봉산(1,303m)이 있고 북쪽으로는 금대봉(1,418m), 대덕산(1,307m)으로 연해지는 백두대간의 큰 산군을 볼 수 있지만 짙은 안개 탓에 보이지 않는다.
 
  함백은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태백시의 도심에 있는 하루 용출되는 물의 양이 5천톤에 이른다.-출처: 태백시)의 진산(鎭山)이다.
 
  함백은 크게 밝은 산이라는 뜻이며 신경준선생이 저술한 《산경표》에는 대박산이라고 표기되어있다. 태백(太白), 대박(大朴)과 함백(咸白)이라는 말은 모두 ‘크게 밝다’는 뜻이다.
 
  대박(大朴)은 현대에 영화가 크게 흥행에 성공했을 때 어떤 영화인이 쓴 데서 유래가 됐던 '대박났다'의 대박(大博)과는 다른 뜻이다.
  함백산 정상을 지나면 넓은 공터가 있고 도로가 있다. 이곳은 중계소가 있어서 차량으로도 함백산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다.
 
   우리 마을에는 길쌈을 하는 집이 많아 삼을 많이 길렀다. 주로 집과 집 사이에 있는 밭에 삼을 심엇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마을 곳곳에 심었던 삼을 벤다. 삼은 마약제인  "마리화나"를 얻을 수 있는 대마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가 어릴 때는 그냥 삼이고 키가 일년생 중 가장 많이 자라는 식물로만 알고 있었다.

 
  봄에 밭을 갈아 골을 타고 가을에 채취한 삼씨를 촘촘히 뿌려 두면 여름 내내 키가 2∼3m나 자라난다. 봄에 허전하던 밭에 삼이 빼곡히 자라게 되면 초가지붕보다 키가 더 커버려 마을은 온통 삼속에 잠기게 된다.

 
  삼의 잎줄기는 가늘고 부드러우며 질겨 시험 칠 때 잠을 쫒는 용도로 사용했다. 밭에 자란 기다란 삼잎 줄기를 잘라 양 눈꺼풀에 끼우면 아무리 잠이 쏟아 져도 눈이 감겨지지 않았다. 이렇게 삼 줄기를 두세 번 눈에 끼우면 밤이 늦도록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다 자란 삼을 베어 길삼(길쌈)을 한다. 다 자란 삼을 베어 한 움큼씩 조심스럽게 눕혀 둔다. 베어진 삼은 무성한 잎을 털어내는 탈곡 작업을 해야 한다.
기다란 삼을 탈곡기에 대고 돌려 삼잎을 털어내었다. 잎을 털어 앙상해진 삼줄기를 한 아름씩 묶는다. 묶은 삼은 몹시 무거워 장정들이 아니고서는 들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삼을 베는 날에는 삼촌이나 동네에서 구한 일꾼이 삼을 베고, 삼잎을 털어낸 삼을 묶고 지게에 지고 가거나 소 질매에 얹어 삼굿에 날랐다.

 
  마을 곳곳의 밭에 키 큰 삼을 베어내면 키 큰 삼에 묻혀있던 마을은 다시 집들이 들어나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긴 삼줄기를 길 한가득 싣고 삼굿으로 옮기는 광경은 어린 내가 보기에 장관이었다.

 
  삼굿은 삼을 삶는 것을 말하는데 마을 어귀에 평소에는 대장장이가 농기구를 만들던 곳인데 삼굿을 할 때는 이곳에 길게 자란 삼을 넣을 수 있는 커다란 드럼통을 잘라 이어 만든 솥을 걸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삼을 삶아 내었다.

 
  삼굿에 불을 지피면 온 동네가 연기에 휩싸이는 듯 했고 김 또한 흰 구름을 만들어 낼 만큼 올라왔다.

 
  집에서 가져간 땔감나무가 한 낟가리가 모두 없어질 때 까지 불을 때고 나서야 솥을 덮어두었던 천막을 걷어내면 수증기가 온 동네를 덮는 듯했다.

 
  삶아낸 삼은 개울가에 널어 말렸다가 개울물에 부풀려 삼 껍질을 벗겨 내었다. 삼 껍질을 벗겨내면 그 속에 새하얀 삼 줄기인 “재랍”이 나왔다.
이렇게 나온 ‘재랍‘ 은 개울가에 막집처럼 세워두었는데 아이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장난을 치거나 소꿉장난을 했다. 햇살을 받은 새하얀 재람 막집 속은 너무 밝아 눈이 부셔서 눈을 재대로 뜰 수 없었다.

 
  삼을 베어 삼굿에 삶아내어 개울물에 부풀려 삼껍질을 벗겨내는 일 까지는 남자들의 몫이었다. 이후부터 과정인 길삼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삼줄기에서 벗겨낸 삼껍질은 다시 삼 머리 부분을 잡고 삼톱으로 누르면서 길게 당겨 삼의 누런색 표피를 벗겨낸다. 껍질을 벗겨낸 삼은 한 묶음씩 묶어서 햇빛에 널어 말린다.

 
  개울를 따라 길게 삼을 말리는 모습과 새햐얀 재랍 막집은 길삼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잘 마른 삼껍질은 집으로 옮겨진다. 옮겨진 삼껍질은 삼껍질 머리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길게 훑어 내리며 삼줄기를 쪼개어 엉키지 않도록 한묶음씩 묶어 빨래줄에 걸어둔다.

 
  가늘게 쪼갠 삼줄기는 한 올씩 머리 부분과 꼬리부분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손바닥에 침을 뱉으며 삼줄기를 이어서 고아주리에 둥글게 차곡차곡 담았다. 이렇게 삼줄기를 잇는 작업을 삼삼기라고 한다.

 
  어머니와 누나는 낮에 농사일로 피곤하였을 텐데도 밤늦도록 평상에서 삼삼기를 했다. 삼삼기를 할 때에는 이웃 아주머니와 누나 또래의 친구와 같이 삼삼기를 했다. 늦은 밤에는 감자나 옥수수를 삶아 야식으로 먹었는데 그럴 때는 나도 꼭 끼어 얻어먹곤 했다.

 
  삼삼기는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올 때 끝이 난다. 삼삼기가 끝나면 어머니는 나에게 뒷산에 가서 산모래를 한 포대기 지게에 지고 오라고 하신다.

 
  베날기를 하는데 삼삼기를 한 실을 담은 광주리 10개에 내가 가져온 산모래를 덮고 삼실을 한 올씩 모아 10올을 움켜쥐고 마당 양쪽에 한필 길이가 되게 기둥을 세우고 왔다 갔다 하면서 삼실 묶음을 만든다. 산모래를 덮어주는 것은 삼실이 풀리면서 엉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베날기를 한 날실을 바디에 끼워 도투마리에 걸고, 반대편에는 끄실개를 놓고 날실을 팽팽하게 당긴다. 그런 다음 베매기 솔에 밀가루 풀을 묻혀 날실에 풀을 먹인다. 날실이 걸려 있는
  아랫쪽에는 베매기한 실이 잘 마르도록 벳불을 피워 놓는다. 베매기할때는 하루 종일 메케한 연기를 마셔야만 했다. 풀이 잘 마른 날실은 도투마리에 감는다. 이렇게 베매기한 도투마리를 베틀에 올리고 겨울 내내 베짜기를 했다. 어머니가 배틀에 앉아 베북을 좌우로 옮길 때마다 바디소리가 철거덕 소리가 났다. 이 소리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겨우내 밤낮으로 베틀에 앉아 한필 정도의 삼베를 짰다. 삼베는 올이 가지런하고 촘촘히 짜야 돈을 더 받을 수 있었다.

 
  함백산을 뒤로하고 20여분 후에 중함백에 닿는다. 중함백을 내려서자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함백산에서 일출과 조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함백산은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의 진산의 신비로움을 안개 속에 감추고 있었는지 모른다.
 
  중함백을 내려서자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중함백에서 20여분 은대봉(1,442m) 정상에 닿는다.
 

  은대봉(銀臺峰:1,442.3m)은 신라 선덕대왕때의 자장율사가 함백산 산자락에 있는 정암사(靜庵寺)를 세울 때 조성된 금탑, 은탑에서 금대봉과 은대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은대봉에서 돌계단의 내리막길을 내려서자 국도 38호선의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두문동재(杜門洞峙,1,268m))의 표지석이 나타난다. 두문동재는 만항재(1,330m)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개이다.
 

두문동재 표지석 앞에서


  두문동재는 싸리재라고도 부른다. 정선사람들은 고개 너머에 싸리마을이 있다고 싸리재라 불렀고, 태백사람들은 고개 너머에 두문동이 있다 해서 두문동재라 했다. 두문동재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서울에서 태백을 잇는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복한땅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두문동은 조선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72명의 고려 유신들이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며 관직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은거하며 모여 살던 곳이다.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에서 유래가 된 두문불출(杜門不出)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에 얽힌 역사가 들어 있는 사자성어이다.
 
  이들 중 일부가 삼척으로 유배를 간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보러 가다가 왕이 죽은 소식을 듣고, 삼척에서 태백으로 넘어오는 건의령(巾衣岺)(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의복을 뜻하는 의(衣))에서 관모와 관복을 벗고, 이곳으로 와 두문동이라 이름 짓고 정착하여, 지금의 두문동재란 이름이 생긴 연유가 되었다.
 
  두문동재에서 아스팔트길을 건너 두문동재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긴 숲속 오르막을 오르니 금대봉이다.
 

금대봉 정상석


  금대봉은 “검대”에서 유래되었는데 “신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금대봉과 은대봉의 이름은 신라 선덕왕 때 자장 율사가 함백산 북서쪽 사면에 정암사를 창건하면서 금탑, 은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나무위키)
 
  금대봉은 한강의 발원지(하구로 부터 물줄기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점)인 검룡소가 있는 산이다.
 
  금대봉을 지나자 평탄하고 걷기 좋은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진다. 길 양쪽에는 원시 식물들이 자라는 숲은 고산지대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비비추며 양치식물인 나무고사리는 깊은 숲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식물이다. 이렇게 이름 모를 고산 식물들에 나 자신의 무식함에 머리가 아파올 때 쯤 수아밭령이다.
 

수아밭령이라는 이상한 이름



  수아밭령의 구석진 곳에 수아밭령 표지목이 한쪽에 감추어져 있다. 태백시에서 세운 수아밭령 표지목에는 수아밭령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날 화전에서 밭벼를 재배한 관계로 수화전(水禾田)이란 지명이 생겼다가 다시 줄여서 화전(벼화, 밭전)이 되었다. 지역민들은 “수아밭”이라 불렀으며 오늘날 태백시에는 벼를 재배하는 농가가 없다.》
수아밭령 지명유래의 또 다른 주장은
《쑤아밭은 이름이 ‘쑤아’이고 논이 아닌 밭(고개)이라는 뜻이다 쑤아밭령은 고려가 멸망하자 강원도 정선으로 숨어 들어가 두문동이라는 이름을 짓고 살던 고려 유신들이 분통터지게 열 받치는 심정을 암호화된 지명속에 숨겨두었다. 쑤어바(訴我把:소아파)는 수아발로 발음된다, 옛 발음은 ‘쑤아발’인데 ‘쑤아발’은 ‘쓰아발’이 되고 다시 ‘씨아발’이 되어 ‘씨-발‘이 된다.
 
  이곳으로 피난온 고려 유신들은 이 고개를 넘으면서 신세 한탄으로 ’씨-발‘이라는 고개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용호 박사 논문 중에서-
  조선건국을 반대하며 두문동으로 숨어들어온 고려유신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고개 이름에 숨겨두고 불만을 표출 하였던 것이다.
 


  수아밭령에는 발원지 탐방 표지석이 있다.
  서쪽으로는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가 있고 남쪽으로는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이 있다.
  수아밭령을 뒤로하고 가파른 오르막을 하체의 남은 힘을 다해 40여분 오르니 비단봉 전망대에 도착한다.


비단봉 전망대에서


  함백산과 은대봉, 두문동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단봉의 정상석은 전망대에 있고, 오르막을 오른 후에야 비단봉 정상이다.
 
  조망이 좋은 비단봉을 넘어 서니 풍력발전단지가 나타나고 고랭지 채소밭이 펼쳐진다.
 

왼쪽이 대간 마루금


  오른쪽 계곡 이어진 길을 걸어가니 도랑을 건너는 다리를 지난다.
 
  백두대간은 마루금과 분수령을 지나야하는데 왠 계곡을 건너는 다리라니 의아했는데 같이 동행해주신 한선생님은 풍력 발전단지가 있는 왼쪽 능선길이 백두대간길인데 풍력 발전소가 생기면서 대간길을 돌려놓았기 때문이란다.
 
  하루 빨리 우리의 대간길이 복원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관계당국은 하루빨리 시정조치해 주기 바란다.
 
  마루 금을 벗어난 길 양 옆에는 고랭지 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채소밭에는 굵은 돌들이 많은 자갈밭이다. 이곳 고랭지 채소밭은 해발 1000m 가 넘는 국내에서 유일한 고랭지 채소밭이다. 채소밭에는 여름에 수확할 어린 배추가 심어져 있다.
 
  한여름에는 배추가 물러져서 해발고도가 낮은 일반 밭에는 배추를 기를 수 없기 때문에 고랭지에서 기른 배추는 언제나 비싸다.
  매년 여름 배추는 포기당 만 원 이상이 되기 일쑤다. 채소밭에서 제초제를 치고 있는 농부에게 물으니 배추를 수확할 때까지 다섯 번 정도 김을 매줘야 하는데 할머니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김을 맨다고 한다. 경사도가 30도 이상이 되어 보이는 자갈이 억수로 많은 밭에 농사를 짓는다는 게 놀랍다.
 
  드넓은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니 산림청에서 세운 매봉산 정상석이 황량하게 세워져 있고, 태백시에서 세운 바람의 언덕 표지가 세워져 있다.
  바람의 언덕은 일출과 운해를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드넓은 배추밭과 어우러진 풍력 발전기를 보면 장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채소가 푸르게 자라지 않은 봄이나 가을에는 리뷰만큼 볼거리가 없어 보인다.
 

주변이 황량한 바람의 언덕 표지


  태백시는 바람의 언덕 주변의 풍력발전단지와 고랭지채소밭 주변을 하루 빨리 정비하고, 백두대간의 마루금 길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황량한 바람의 언덕 전망대를 지나 숲속으로 이어진 오르막을 오르니 매봉산이다.
 
  매봉산의 본래 이름은 천의봉(天儀峰)으로 하늘을 들어 움직일 만큼 거대하고 웅장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매봉(산)은 황지동에 오래된 무덤이 하나 있다. 연일 정씨 묘로 금계포란 형국의 그곳에서 바라보면 천의봉이 매처럼 보인다하여 매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상석은 한 면은 천의봉 1,303m, 또 한 면은 매봉산 1,303m라고 적혀 있다. 정상석에서 사진을 돌려가며 찍으면 천의봉과 매봉산을 오른 것 같이 된다.
  매봉산에서 내리막길은 공사로 인하여 찻길과 등산로가 어지럽게 나있다. 한참을 내려가니 낙동정맥 시작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낙동정맥 시작점


  낙동정맥 표지석을 조금 내려서니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세 갈래로 물길이 갈라지는 “삼대강 꼭지점” 조형물을 만난다.
 

삼대감 꼭지점


  조금 내려가면 도로를 가로질러 등산로가 있고 걔속 등산로를 따르니 삼수령(피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피재는 삼척사람들이 난리를 패해 황지(黃地)로 넘어온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삼수(三水嶺)은 오십천과 낙동강과 한강의 분기점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수려 표지석


   삼수령은 두타산, 덕항산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매봉산을 향하는 산줄기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징 때문에 이곳에 내린 비는 남쪽으로는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 천을 거쳐 영남지방을 거쳐 남해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정선아우라지를 거쳐 남한강, 수도 서울을 지나 서해로 흘러가고, 동쪽으로 오십천을 거쳐 동해바다로 흘러간다. 이런 지형적인 특징 때문에 삼수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태백시내와 가까운 평범해 보이는 고갯길이지만, 三대강(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라는 지리적인 특징과 의미를 갖는 곳이다.
  속리산에서 동쪽으로 향하던 백두대간이 매봉산을 기점으로 백두대간은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번 산행기는 산 이름과 고개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많고, 역사와 전설이 많았습니다.  역사 여행 이었습니다.
산 이름과 고개며, 여럿 명소들이 많아 정리가 잘 되지 않았으나 같이 동행주신 한용환선생님의 사진 산행기 도움으로 산행기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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