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백두대간 28구간은 고치령(770m), 미내치(830m), 1097봉(헬기장), 마구령(820m), 갈곶산(966m), 늦은목이재, 선달산(1,236m), 박달령(970), 옥돌봉(1,244m), 도래기재(920m) 까지 도상거리 26.9km로 거의 70리를 걷는 대장정의 대간길이다.
드림산악회 백두대간 28구간부터는 무박 산행이다. 토요일 11시 40분에 출발하여 일요일 03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선경과도 같았던 운무 속의 연화봉-비로봉-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산의 능선에서의 진한 여운이 아직 생생하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대간 원정대는 기념사진을 찍고 열쩡을 외친 후 대원들은 좌석리 전 마을 이장(서갑수씨)의 소형트럭의 짐칸에 올라탔다.
서갑수씨는 고치령으로 이동하는 등산객들에게서 일인당 개인은 5,000원, 단체는 3,000원씩 받고 트럭을 운행한단다. 트럭이지만 이런 교통편이 없었다면 5km를 걸어서 접속구간을 이동해야한다.
어두운 밤의 숲은 흑백이다. 흑백의 숲속에 간간히 나타나는 별빛은 유난히도 밝다. 흑백의 숲속에 별빛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한다. 우리 대원들은 덜컹거리는 트럭의 짐칸에 앉아 별을 센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어느덧 트럭은 어둠속에 잠겨 있는 들머리 고치령에 닿았다.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과 소백산 산신령이 된 금성대군을 모시는 산령각이 어둠속 불빛에 비친다, 산신각에는 새벽에 기도하기 위해서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이 이불을 덮어 쓰고 있다. 새벽 3시에 들이 닥친 대간대원들의 발소리에 깬 듯 일어나 앉아 있다. 일 년 내내 이 산신각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어둠속 새벽 세시 어둠속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28구간을 시작한다.
헤드랜턴을 켠 대원들은 하나 둘씩 어둠속 백두대간의 숲속으로 사라진다. 급히 뒤따라 보지만 이미 불빛은 사라지고 후미 대원들의 숨소리만 들린다.
저기 동쪽하늘에 밝은 상현달이 나무숲속에서 사라 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따금 짐승소리만 들릴 뿐 백두대간의 능선은 적막 속에 잠겨있다. 혹시나 짐승들이 놀랠까봐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500m마다 세워져 있는 국립공단의 표지판이 헤드랜턴의 불빛을 받아 밝게 길을 안내하고 있다. 뒤쳐진 후미 대원들을 기다리며 천천히 길을 걷다보니 마지막에 트럭을 탄 대원들이 후다닥 우리를 추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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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을 출발한지 한 시간 반 여명이 밝아온다. 이제 헤드랜턴을 끄고 숲속을 걷는다. 새벽의 고즈넉함이 마음을 한층 평온하게 한다. 이제 산새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고, 바람소리, 풀잎에 맺힌 이슬하나에도 마음을 빼앗긴다. 길은 대간길 답지 않게 부드럽고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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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과 소백산의 정중앙 마구령(馬駒領)에 닿는다. 임도 좌측은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이고 우측은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다. 부석면의 두 동네를 가르는 고개이지만 충북 단양의 영춘과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하동면)의 사람들이 영주의 부석장을 오가던 고개이다. 남대리에서 마구령으로 올라가는 산길의 입구에는 ‘주막거리’가 있는데 예전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시간을 내서 주막거리를 한번 다녀와야 겠다.
마구령 동쪽 남대리는 정감록에서 십승지(十勝地)로 조선 풍수의 대가 ‘남사고’가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숨어 있다고 밝힌 명당의 마을이다. 첩첩산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펑퍼짐한 터가 있어 영주시 순흥으로 유배왔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른 아침의 대간길 마구령은 너무 조용하여 적막하기 까지 하다. 우리 대원들은 후미 4명만 남기고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 즐기자. 이 새벽의 여유로움을 즐기자. 새벽 이슬을 머금은 철쭉꽃은 더욱 화사하고 아름답다.
오름이 시작된다. 대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에 정신이 팔리다보니 정상에 철쭉으로 둘러싸인 바위가 비켜 서 있다. 바위에는 ‘어흥이봉‘(1,080m)표지석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성과 의미를 알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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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흥이봉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갈곳산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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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분수령은 마구령에서 고도를 높이며 동쪽으로 향하다 갈곳산을 빚은 후 남쪽으로 분기한 산줄기 우측에는 부석사의 배산(背山)인 봉황산(818.9m)이 솟아 있다. 그러나 갈곳산에서 부석사로 가는 길은 무슨 이유인지 ‘등산로 아님‘ 팻말과 함께 목책으로 막아놓았다.
부석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서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역사시간에 뜻도 모르고 외운 기억이 뚜렷하다.
이곳 김삿간면과 부석사는 가까이에 있다. 부석사 안양루(安養樓)현판에 김삿갓이 직접 쓴 시가 걸려있다.
부석사
평생에 여가가 없어 이름난 곳 못와 봤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타고 달려 온듯
우주간에 내 한몸이 오리 마냥 헤엄치네
백년동안 몇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상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김삿갓도 세월의 인생무상을 시로 남겼다. 무상이란 만물은 항상 변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생무상은 ‘사람의 일생 또한 영원하지 않고(덧없이: 매우 짧게) 흘러간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은 반복되지만 우리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고 덧없이 흘러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소중여겨야 한다.
무심코 지나는 풀 한포기, 꽃 한송이에도, 흰 구름 둥 떠가는 구름 한점도, 스쳐지나가는 바람 한 점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도 다시는 그 순간이 오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뛰어난 필력으로 많은 시를 남겼다. 김삿갓의 널리 알려진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김삿갓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팔도 이곳저곳을 누볐으며, 때로는 한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여 후학을 기르고 숙식을 해결했으며, 때로는 걸인으로 쉰밥을 얻어먹으며 욕을 시로 쓰는가하면,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했으나 주인에게 쫓겨나며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마구령에서 잠시 휴식 후 끝날 것 같지 않는 가파른 오르막을 450m의 해발고도를 숨을 몰아쉬며 오른다. 마구령에서 1시간 30분만에 마침내 선달산(1,236m) 정상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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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던 대간팀들이 점심을 먹고 일어선다. 우리 후미도 점심을 먹기 위해 베낭을 풀어 놓는다. 대원들이 싸온 반찬을 서로 권하며 지나온 힘든 여정을 달랜다. 마지막 후미 대원을 기다린 후 선달산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한 시간 반을 걸어 넒은 헬기장을 지나고 좌우로 임도가 있는 박달령이다. 박달령, 박달재라는 지명은 참으로 많다. 이곳 박달령은 영월의 김삿갓면과 봉화군 춘양면을 잇는 고개이다.
박달도령과 금봉이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울고 넘는 박달재는 제천시 봉야변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해발고도 504m의 고개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작사 : 반야월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던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 구나 박달재의 금봉이냐
반야월 선생은 해방직후에 박달재를 지나다 성황당에서 젊은 부부가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리며 통곡하기에 그 모습을 보고 이 가사를 썼다고 한다.
이 노래는 요즘 젊은이들이 도저히 느끼지 못할 사랑의 애틋함(아끼고 위하는 정이 깊다)을 나는 느낀다.
박달령의 길 건너에는 박달령 신위를 모신 산신각이 있는 좌측에는 식탁과 의자가 있는 쉼터가 있다
여름이 다가오자 나는 더욱 바빠졌다. 여전히 농사일도 도와야하고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했다. 국민학교 때와는 달리 중학교 공부는 하루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매일 영어 단어를 외워야 했으며 수학은 매일 복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벌한 수학, 영어시간과 달리 국어시간 만큼은 늘 기다려졌다.
국어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하신 여 선생님 이셨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셨는데 나는 그때마다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늘 나에게 눈을 마주쳐 주셨으며 나에게 온화한 미소까지 지으셨다.
어느덧 대지는 여름 햇살을 받아 이글거렸다. 밭에 가서 일을 하면 땀이 범벅이 되었다. 벼는 나날이 시퍼렇게 잎을 빳빳이 세우고 자라고 있었으며 벼가 자라는 논에는 뜨거워진 물이 후끈한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벼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논에는 물옥잠, 너도방동사니, 마디 꽃, 피 같은 잡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때 김을 매지 않으면 논에는 잡초로 뒤덮인다.
일요일이 되면 논에 가서 김매기를 해야 했다. 논에 엎드려 김을 매면 억세어진 벼 잎은 얼굴과 팔을 긁어 피부는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등에는 쇠파리가 달려들어 등을 꼬집는다. 얼굴과 온몸은 논의 흙탕물로 범벅이 된다. 태양은 등 바로위로 내려앉은 것 같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벼논에 묻혀서 이고랑 저고랑 김을 매고 나면 흙탕물로 뒤집어 쓴 몰골은 말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김을 다 매고 난후 덤 밑의 개울물에 풍덩 뛰어들면 날아 갈 것 같이 기분이 좋아진다. 옷은 잘 빨아 자갈밭에 널어놓고 덤 밑의 그늘에 누워서 한숨자고 나면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과 어머니의 잔소리를 한동안 듣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일을 하면서도 기말고사 시험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발표된 시험시간표에 따라 시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참고서를 빌려 보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먼저 시험공부를 하고 참고서를 돌려줘야 한다.
은자는 전보다 더 많은 참고서를 자기 동생을 통해 우리 집으로 갖다 줬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참고서에 줄을 긋지 않고 공부를 해야 했다. 학교 마치고 하굣길에 나무 그늘에 앉아 공부를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일요일에는 공부할 책과 공책을 챙겨들고 소를 몰고 뒷산으로 갔다. 소를 풀어 놓은 후 그늘에 앉거나 나무위에서 공부를 했다, 잠이 올 때는 나무위에서 공부해야 잠을 쫓을 수 있었다. 나무 위에서는 졸면 나무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졸음을 쫓을 수 있었다.
나는 중간고사 때 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공부하고 있는 친구의 방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서야 나도 불을 끄고 잠을 잤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침, 저녁 나에게 일을 시켰다. 소꼴은 새벽에 나가서 한소쿠리 해다 놓아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전보다 일도 더 많아졌지만 공부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드디어 중학교의 첫 기말고사가 끝이 나고 중학교 첫 방학이다. 방학식날 받은 성적표는 내가 봐도 대견했다. 성적표를 식구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대청마루에 놓고 소를 몰고 산으로 갔다. 산에는 풀이 전보다 더 무성했으며, 더욱 많아진 뭉게구름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산과 들은 더 아름다웠으며 더 싱그러웠다. 세상은 새롭게 태어난 듯 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 소를 몰고 집으로 왔다. 대청마루의 성적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앞쪽으로 오늘 대간의 최고봉인 옥돌봉이 우뚝 서 있다.
백두대간의 끝날 때 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서너 번의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 후에야 옥돌봉 0.24km 이정표가 나타난다. 좌측에 옥돌봉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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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돌봉에 힘겹게 오르니 오늘 대간 길의 최고봉 옥석산(옥돌봉) 정상석이 나타난다. 해발 1,242m은 가지산(1,240m)보가 더 높은 산인데도 높게 보이지 않는 것은 주변의 백두대간의 높은 봉우리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정표에는 옥돌봉이라 적혀 있고 정상석은 옥석산이라 적혀 있다.
옛날 이곳에 옥돌이 있어 햇살을 받으면 그 빛이 멀리 예천까지 비쳤다하여 옥돌봉이다
옥석산에서 2.76km의 울창한 숲길을 내달려 마침내 오늘의 날머리 도래기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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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기재는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서벽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역(驛)이 있어서 도역마을이라 불다가 도래기재로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29차 대간 길은 이 도래기재에서 구룡산을 넘어 태백산을 넘는 구간이다. 백두대간은 적어도 태백산은 넘어야 고참 대접을 하고 , 계급도 병장으로 달아준다고 한다.
이제 백두대간도 말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건강에도 조심해야하고 백두대간의 종주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야한다. ‘인생무상‘, ’백두대간의 여정‘ 또한 매우 짧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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