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 31구간

머투리 2023. 6. 27. 09:13

  드림산악회 백두대간 북진종주 31구간은 삼수령(피재), 건의령, 푯대봉(1,009.2m), 갈림길, 한내령, 구부시령, 덕항산(1,071m), 환선봉(지각산:1,080m), 자암재, 귀내미마을(배추밭), 큰재, 황장산(1,092m), 댓재를 이어 간다.
 
  三대강 한강, 낙동강, 오십천이 세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수령을 지나면서 대간의 성격이 확연히 바뀐다.
  소백, 태백, 함백산으로 이어가며 1,500m을 넘나들면서 장쾌한 능선을 보여주던 대간길은 삼수령을 지나면서 1,000m 안팎으로 다소 낮아져 주변의 산과 도로와 마을이 조화를 이루면서 대간을 이어간다.
  지리산에서 북으로 치닫던 백두대간은 속리산에서 크게 오른쪽으로 꺾어 태백, 함백산으로 이어지다가 동해바다를 만나 백두산을 향해 북으로 줄달음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 삼수령을 지나면서 서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이지만 동쪽으로는 급경사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새벽 2시20분에 삼수령에 도착한 백두대간 원정대 대원들의 헤드랜턴의 불빛은 긴 행렬을 이룬 채 하나둘 숲속으로 사라진다.
  등산로 초입은 임도로 이어져 비교적 수월하여 여유롭다. 임도를 벗어나 완만한 오름의 좁은 산길로 접어들자 경사가 심하지 않는 오름과 내림이 계속 된다. 길 양쪽으로 마을의 불빛이 새벽의 적막 속에 간간히 비치는 가운데 백두대간 원정대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원정대의 숨소리에 놀란 고라니 한마리가 길을 가로 질러 후다닥 뛰어간다. 뛰는 고라니에 부딪히기라도 하는날에는 크게 다칠 수 있다.
 
  잠을 떨치고 걷는 대간길은 나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 새벽의 근육은 이완되어 있고, 의식과 단절된 근육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의식에 제대로 반응을 할 때까지 조심해야한다. 잠에서 덜 깬 몸은 갑작스런 외부충격에 다칠 수 있다.
앞서가던 한선생님은 몸이 덜 푸렸는지 내리막길에서 발을 헛디뎌 이마와 다리를 다치셨다.

  그러나 후미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걷기를 한 시간 후미에서 격지 않아야 할 것이 왔다.
  후미는 두 가지 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첫 번째는 혼자 뒤쳐져서 걷다가 알바를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먼저 도착한 선두 대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까봐 이다.
  삼수령을 출발한지 한 시간 남짓 길 양옆에는 송전 철탑에서 나오는 작은 불빛이 반짝이는 지점이다.
  앞서가던 대원이 길이 없어졌다고 외친다. 넓은 길이 다소 거칠다는 생각이 멧돼지 짓이겠지 하며 앞선 대원을 따라가기를 7∼8분여 길이 보이지 않는다. 건너에는 여러 개의 불빛이 앞선 대원들의 후레쉬 불빛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불빛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 순간 알바를 했음을 알게 되었다.

  앞에는 송전 철탑이 덩그러니 서있고 길은 거기서 끊겼다.
  6명의 대원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길을 찾으나 길이 없고 잡목과 수풀이 앞을 막고 서있다. 이제는 희미한 길도 보이지 않는다. 6개의 불빛은 보이지 않고 우리는 고함소리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길을 찾았다.
 
  그러기를 한참 만에 길을 찾았다는 대원의 외침소리가 들려 소리가 나는 곳을 풀과 나뭇가지를 헤집고 갔더니 넓은 길이다. 넓은 길을 따라 되돌아가서 우측으로 난 대간 길을 찾았다. 후미에서 20분 남짓 알바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하늘은 왜 후미에게 이렇게 가혹할까?
 
  다시 길을 찾아 걷기를 한 시간 풀숲뿐인 넓은 공터를 만났다. 삼척으로 유배를 간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보러 가다가 왕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고갯마루에 관모와 관복을 벗어 걸어놓고 태백 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건의(巾衣)령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고 했지만 자신이 누렸던 것을 버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을 터인데 고려의 충신들은 자신들의 뜻을 버림을 통해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어둠속에 겨우 인증을 하고 건의령을 나선다.
 
  이제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하지만 울창한 백두대간의 숲속은 후레쉬 불빛이 없으면 어둡다.
  좁은 산길의 우거진 풀섶에 옷이 젖는다. 풀섶의 이슬과 다투는 사이 푯대봉 갈림길이다. 푯대봉은 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푯대봉 정상을 오른다. 푯대봉을 향하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백두산을 향해 북쪽으로 줄달음치는 백두대간은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동해바다가 있는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는 전형적인 동고서저 지형이다. 그래서 동쪽은 나뭇가지 이외에는 막힘이 없다. 푯대봉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푯대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을 만난다.

푯대봉에서 일출


 
  구부시령을 향하는 대간길은 오름과 내림이 계속 이어진다. 길 양옆으로 참나무와 적송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서너 개의 오름과 내림 후에 잡목이 무성한 구부시령 고개이다.
  주막을 하던 여인의 지아비가 연속해서 요절하여 아홉 명의 지아비를 모실만큼 어려운 삶의 환경이라 하여 구부시령(九夫侍嶺)이라 부른단다.

구부시령 표지목


  이곳에서 30여분 진행하니 덕항산이다. 덕항산 오른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며 왼쪽인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덕항산은 산보다 물골계곡의 대금굴로 더 유명하다.
 
  같이 동행해주신 한 선생님은 대금굴이 생긴 연유를 다음과 같이 들려 주셨다.
   『물골 계곡은 한겨울에도 풍부한 계곡물이 흘러 물골을 다녀간 사람들은 ‘여기만 오면 발밑이 울리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였다.
   물골에서 송어와 산천어 양식을 하던 우국제씨가 계곡 상류에서 엄청나게 많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계곡 중턱에 올라 땅에 귀를 대고 들으니 땅속에서 구쿵 쾅쾅하는 소리가 나서 당시 삼척시장에게 건의하여 동굴을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탐사 작업은 산 정상 인근에 소량의 물이 나오는 곳을 파고 들어가 수직으로 100m정도 내려간 끝에 엄청난 양의 폭포수가 흐르는 지하 광장을 발견하여 지하광장을 연결하는 수평 인공 동굴로  연결하여 대금굴이라 이름 짓고 동굴을 개방하였단다.』
 
  지금은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만 덕항산의 산 정상은 산세가 수려하고 동남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암벽, 하늘을 떠받히고 있는 듯 한 병풍암, 촛대봉등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고 한다.
 
  덕항산에서 오늘의 종착지 댓재 도착시간을 계산해보니 10시간의 주어진 산행 시간을 초과한다. 이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늦으면 하산주는 커녕 씻을 시간도 없다.
 
 
   중학교 첫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 때는 학교에 간다는 핑계를 될 수가 없었다. 늘 들에 가서 밭을 매거나 논을 매야했다.
  곡식이 자라는 들에는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온몸으로 햇볕을 맞아야만 했다. 얼굴과 어깨와 등은 햇볕으로 그을려 물집과 함께 피부가 하얗게 벗겨졌다.
 
  새벽에는 소꼴을 한 망태기 해야 했으며 아침을 먹고 난 후에는 밭이나 논에서 풀을 매야 했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이 그림자마저도 삼킬 때면 들녘은 적막에 휩싸인다.

 
  나른한 기운이 온몸의 기운을 빼앗을 무렵에 개울에 가서 목욕을 한다. 서쪽의 덤은 뜨거운 오후의 햇볕을 가려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은 빨아 강바닥의 매끈한 돌무더기위에 널어놓으면 뜨거운 햇볕은 옷의 물기뿐만 아니라 땀 냄새마저도 삼켜버린다.

 
  나른한 오후의 기운은 가져간 책을 펴지도 못하고 나를 잠들게 했다.

 
  농사일이 많아졌지만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를 하였다기보다는 공부하려고 애를 썼다.

 
  여름 낮의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산에 소 먹이러 간다. 나는 영어 단어장이나 수학연습장을 챙겨 소를 몰고 산으로 간다.

 
  산등성이에서는 나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산에는 온갖 벌레와 개미들이 저마다 분주히 먹이를 찾는다. 벌레들은 나를 공부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분주히 손이며 팔이며 다리며 가리지 않고 기어오른다.

   어느덧 산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소를 몰고 집에 왔다. 소 외양간에 소를 매어 놓고 방에 들어와 밤늦도록 공부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이 시간은 은자생각도 많이 났다. 그러나 은자로 인해 공부에 뒤쳐질까 노심초사했다.
 
  학교에 가는 일이 없으니 탱자나무 우체통은 늘 비어있기 일쑤였다. 은자는 필요할 때마다 그녀의 동생을 동원했다. 동생은 훌륭한 우체부 노릇과 택배 집배원 노릇을 했다.

 
  은자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사탕봉지를 동봉했다. 그 사탕은 군것질거리가 없던 나에게는 더 없이 달콤했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몰래 꺼내 먹는 사탕 맛은 달콤했다, 은자는 내가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아는듯했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새 쫓으러 논에 가야 했다. 우리 집은 남들보다 벼를 일찍 심어 일찍 수확하기 때문에 벼가 영그는 팔월이면 산과 들의 새들이 모두 우리 논으로 날아 왔다.

 
  나는 공부할 책과 노트를 챙겨 논에 갔는데 강둑에 널찍한 돌을 놓아 펑퍼짐하게 만들어 그 위에 엎드려서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수학문제를 풀었다.

 
  공부를 하면서도 새를 쫒는 것을 개을리 하지 않았다. 새가 오면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거나 요령이 달린 새끼줄을 당겨 소리를 냈다. 하지만 새는 달아나기는 커녕 더욱 벼를 조아대었다.

 
  펑퍼짐하게 만든 돌방은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 만들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그늘이 졌다.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아카시아 나무아래 돌방은 나의 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논둑에서 이리로 누가 오고 있었다, 단발머리 찰랑거리면서 다가온 것은 은자였다. 늘 함께 다니던 동생은 보이지 않고 혼자 분홍색 향기를 뿜으면서 가까이 다가 왔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앉기 편한 돌방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내가 공부하던 책과 노트를 물끄러미 보며 앉았다, 새까만 그녀의 눈빛은 위로와 찬사가 묻어 있었다.


“공부 많이 하네
“응 그렇지머”
“우리 오빠가 그러던데 니가 영어 단어를 많이 외웠다면서?”
 
  그녀의 오빠는 내가 산에 소 먹이러 가면 늘 영어단어를 외우라고 했으며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올때는 외운 영어 단어를 점검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지지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나는 부모와 어떤 친척으로이나 형제로 부터도 그런 말을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들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에 서둘러 먼저 집으로 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는 나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갔다. 아버지는 지붕에서 떨어지신 후 기력이 없으셔서 버스를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모시고 갈 때마다 택시를 이용해야만 했다, 농사는 어머니 혼자서 누나와 내가 도와 겨우 지을 수 있었다.

 
   농사로 나오는 소득은 주로 벼농사였다. 벼는 가을에 탈곡하여 정부가 하는 벼를 수매해서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탈곡하여 출하를 조절하는 것이다. 벼를 수매하는 날은 벼 가마니를 경운기로 한가득 싣고 면소재지의 벼 수매 장으로 갔다.

 
  벼 수매 장은 그야말로 벼 가마니로 가득하였다. 벼는 동별로 두 줄로 쌓아야 하는데 40kg의 벼 가마니를 경운기에서 혼자 내려 정해진 장소에 짊어지고 가서 쌓는 일은 중학생인 나로서는 무척 힘이 들었다.
 
  아침 9시가 되면 수매 담당 공무원이 와서 벼 등급을 매긴다. 검사원이 색대(가마니를 찔러 벼를 빼내보는 도구)로 찔러 검사하여 벼의 수매 등급을 말하면 뒤를 따르는 한사람은 검사원이 불러주는 등급의 도장으로 벼 가마니에 등급을 찍는 것이다. 등급은 1등급에서 3등급 까지 있는데 등급에 따라 수매가가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검사원이 지나가면 농민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운기에 한가득 실으면 40여가마가 되는데 경운기로 서너 차례 실어 날라야 했다. 등급이 매겨지면 벼 가마니를 창고에 쌓아야 하는데 벼 가마니를 등에 짊어지고 높이가 10미터 됨직한 곳으로 벼 가마니를 짊어지고 가서 쌓아야 했다.

 
  벼 수매가 끝나면 동장이 수매값을 가지고와서 마을회관에서 나누어 주는데 수매가가 100만원이 조금 안되었던 같다.

 
  이 돈으로 우리 식구가 일년 동안 먹고 나와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것이다. 밭에서 나는 콩이나 참깨와 같은 잡곡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비와 식구들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한 금액이었다. 아버지의 병원비는 거의 빚으로 해결해야 했다.

 
  사채는 1년 이자가 3부였다. 100만원을 빌리면 1년 이자만 30만원이었다. 어머니는 수매한 돈은 모두 돈 이자를 갚는데 썼다. 겨울 방학 때는 새끼(짚으로 만든 줄) 꼬기를 하였는데 새끼 꼬는 기계가 우리 집에 있었다.
  

  양발로 밟으면서 짚을 넣으면 빙빙 돌면서 새끼가 꼬아지고, 꼬아진 새끼가 뒤쪽으로 보내지면 실타래처럼 둥그렇게 감는 기계였다.

  새끼를 한 마끼 꼬아 방앗간에 가져가면 괜찮은 금액의 돈을 줬다. 방앗간에서는 그 새끼를 가마니를 묶는데 사용했다. 나는 틈틈이 새끼를 꼬아서 팔아 참고서와 노트 등 학용품을 샀다.

 
  덕항산을 뒤로하고 40분 만에 환선봉(지각산)에 닿는다. 같이 동행하신 한 선생님은 환선봉은 일명 지각산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찌걱산이었다고 한다. 찌걱산의 유래를 한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옛날 산 아래 조탄리에서 숙암리로 가려면 찌걱산 쪽으로 걸어 다녔는데, 젊건 늙건 남자 여자가 함께 같다하면 꼭 바람이 났다고 한다.(구금 표현으로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고 하여 찌걱산이라 했다고 한다.』
 
  솟은 모양이 소의 뿔을 지각산이라고 하지만 골지천 물길이 찌걱산 쪽으로 깊숙히 파고들어 돌아가는 형세가 음양이 합해진 모습과 같다고 한다.

   관리들은 이런 퇴폐적인 이름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지각산, 환선봉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일 테지만 지형과 유래된 이름을 보존하고 가꾸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교문화 때문에 세계에서 특이한 한국의 성보수를 낳게 되고 산골의 재미있는 성묘사 조차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경북 영천에 관련된 말 중에 ‘영천 대 말좆’ 이라는 영천을 혐오하는 말이 있다.
  영천시는 ‘영천 대 말좆’의 ‘말’ 을 소재로 하여 승마 공원과 경마공원을 육성하여 말을 테마로하는 말 산업 단지로 ‘영천 대 말좆‘ 을 상품화 하고 있다.
 
  찌걱산의 기를 얻어 다시 힘을 내어 본다. 찌걱산에서 30분 자암재에 닿는다. 자암재를 지나 낮은 고개를 넘으니 고랭지 채소밭이 있는 귀내미 마을이 보이고 넓은 고랭지 채소밭이 펼쳐진다.
 
  귀내미 마을은 1987년 삼척시 하동면에 생기면서 수몰지에 살던 37가주가 이곳 귀네미 골로 터를 옮기면서 생겼다. 원래 전해져 내려오던 마을 이름은 쇠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우이곡(牛耳曲)였는데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온다는 뜻으로 ‘귀래미(貴來美)’에서 유래된 귀내미 마을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귀내미 마을의 고랭지 채소밭도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산을 개간하여 면적이 65만3,000㎡에 이르는 배추밭이다.
 
  매봉산 바람의 언덕에 있는 고랭지채소밭의 절반 정도이지만 배추가 자라면 초록의 배추밭과 왼편의 동해의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하지만 고랭지 채소밭을 일구면서 백두대간 길은 이리저리 내 팽개쳐져 있다. 배추밭으로 인해 길은 가장자리로 쫓겨나 있으며 배추밭 개간으로 만들어진 포장도로는 햇빛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임도나 임도의 샛길이나 모두 햇빛에 노출되고 있다, 임도 샛길은 우거진 잡초가 길을 막는다.
 
  얼굴은 고스란히 햇빛에 노출되며, 가시 덩굴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시덩굴에 긁히기도 한다.
  
  민족의 혼이 담긴 백두대간 길을 온 나라가 보존하고 정비하는데 삼척시는 백두대간을 정비하기는커녕 훼손하고 있다. 삼척시는 훼손된 백두대간을 다시 원 상태로 돌려놓기 바란다.
 
  그렇게 임도와 풀숲에 뒤 덮인 대간길을 걸어 큰재에 닿는다. 큰재는 넓은 공터에 잡풀만 무성하다. BAC 인증이 안 되어 휴대폰을 들고 이리저리 다니느라 가뜩이나 늦은 후미를 더 늦게 한다.
  큰재에서 겨우 인증에 성공하고 길 양옆에 산딸기가 즐비한 대간길이다.
 
  산딸기의 달콤한 맛에 이끌려 산딸기를 입에 넣다보니 더 늦어진다.
 

황장산에서


  큰재에서 산봉우리를 서너개 넘어서서야 황장산에 닿는다. 언제나 그렇듯 대간길은 인내심이 바닥을 들어내고서야 자신을 내어 준다. 황장산은 황장목이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산이지만 황장목은 거리 많지 않다.
 
  황장산에서 30분의 내림길 끝에 댓재에 닿는다.

댓재 표지석


 댓재 기념탑에는
 
  ‘댓재, 해발 810m, 산죽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일명 죽현(竹峴), 죽치령(竹峙領)이라고 불리며, 1984년 10월 지금의 도로가 개통되기까지는 영동과 영서를 넘나들던 옛 고갯길로서 보행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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