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23구간

머투리 2023. 3. 14. 03:46

 

백두대간 북진종주 23구간
산행일자 2023년 3월 12일(일요일)
산행코스 이화령-조령산-재3관문-마패봉-부봉-탄황산-하늘재
도상거리 16.3km
실제거리 30.1km
산행시간 10시간00분(휴식시간포함)

    희양산의 거대한 난공불락의 바위에 고정로프에 몸을 실어 발아래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다보며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목숨의 고비를 넘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오늘 구간 또한 백두대간의 험난한 구간으로 손꼽히는 조령산 구간을 시작한다.
이화령(548m), 조령산(1,017m), 신선암봉(937m), 깃대봉(835m), 조령((제3관문)(665m), 마패봉(920m), 부봉(917m), 평천재(777m), 탄항산 (856m), 모래산(663m), 하늘재(530m)를 잇는 구간이다.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화령에 백두대간 원정대의 버스가 도착한 시간은 7시 30분이다. 봄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 탓인지 3월의 두 번째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이어주던 이화령(梨化嶺,548m) 고갯길은 수많은 차량들이 넘나들었으나 3번 국도의 이화령 터널과 문경새재 터널이라 이름 붙여진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상하행선이 개통된 이후 통행량이 급감하였다. 현재는 4대 강 자전거 국토종주 길과 백두대간의 등산코스로 더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백두대간 원정대는 체조와 기념사진을 찍음과 동시에 이화령 들머리로 사라진다. 백두대간 이화령 들머리에는 산림청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도상거리는 짧은 편이지만 험준한 암반이 많아 실거리가 매우 길고 안전사고 위험도 매우 높은 지역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라고 적혀 있다. 또한 전국에 비 예보와 더불어 기온이 급감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단순한 산행이 아닌 백두대간을 잇는다는 산꾼들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또한 열정으로 백두대간을 시작한 우리 원정대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전국에 내려진 비 예보와는 달리 아침 공기는 차갑지만 온화하다.  분주하게 지나가는 선두팀에게 길을 내어준 나는 이내 평온함을 되찾는다. 고요함 속에서도 귀 기울이면 걸음에 부서지는 낙엽이 지나온 시간들을 이야기 해준다. 백두대간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나온 시간들과 이야기하며 지나간 시간들에 귀기우리면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진다.
  정상 직전에 만나는 조령샘은 자기를 알아 달라는 듯 졸졸 소리 내며 반긴다. 백두대간의 기운이 담긴 시원한 물 한 모금은 꾼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준다.


  9시 해발 1,026m 주흘산(1,017m) 정상에 올라서자 갑자기 경치가 확 트이며 기다렸다는 듯 능선의 근육질을 자랑한다.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문경새재 조령의 이름을 딴 조령산(鳥領山) 표지석에는 “새도 쉬어가는 조령산” 글자가 적혀 있다.
 조령산의 험준함은 신선암봉에 들어서야 본색을 드러낸다.
   1,000m 대로 끌어올린 고도에서 고정 로프에 몸을 맡긴다.  끝이 없어 보이는 오르내림은 대간 종주자들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 길 낭떠러지 위의 바위 절벽에 로프마저 없다.
  


   손에 잡히지 않는 미끄러운 바위에 온몸으로 버텨야 겨우 기어오를 수 있는 암벽구간이 끝이 없이 나타난다. 도저히 오를 수 없어 보이는 천 길 낭떠러지 위의 바위 절벽에 올라서면 드디어 신선과 마주한다. 절묘한 바위와 선비 같은 소나무가 신선계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한국산의 매력을 압축해 놓은 듯 한 절묘한 풍경에 황홀하게 취한다.

암벽위의 소나무


   신선암봉이란 이름을 산이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알름구간을 겨우 올라서면 슬랩 구간(slab : 경사가 심하지는 않지만, 평탄하지 않는 암반구간)에 좌우의 천 길 낭떠러지에 오금이 저린다.
  

오금저린 슬랩구간


  작은 혹성에 올라탄 듯 한 매끈한 슬랩이 지평선 끝까지 나를 데려간다. 드디어 나타난 철계단 덕분에 서슬 푸른 바위암벽 구간 몇 곳을 공짜로 얻은 듯 통과한다. 로프를 잡고 필사적으로 오르던 긴장이, 한 순간 풀리면서 평화로운 세상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하다.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담는다. 암릉구간을 오르내리느라 차가운 봄비도 잊었다. 암벽에 달궈진 산꾼의 들뜬 분위기는 차가운 빗물이 온몸을 적시고 있는 줄도 몰랐다. 명상하는 수도승 같은 전나무 숲이 길게 이어진다.
 

 

  아버지는 해마다 다른 집 보다 먼저 올벼를 심으셨다. 올벼를 심는 논은 강과 접해 있고 높다란 강둑이 있었다. 모내기를 할 때는 중참으로 항상 찹쌀 수제비를 끓여 모내기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일찍 모내기를 했기 때문에 벼가 일찍 영글었다. 그러면 참새 떼가 늘 우리 논에 와서 벼를 쪼아 먹었다. 어머니는 밥을 안쳐 놓고는 새를 쫓으러 논에 가시곤 하였다. 새를 쫓는 일은 여름 방학 때는 나와 동생들의 몫이었다. 나는 방학숙제 거리를 챙겨 논에 갔는데 강둑에 널찍한 돌을 놓아 펑퍼짐하게 만들어 그 위에서 방학 숙제를 하면서 새가 오면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거나 요령이 달린 새끼줄을 당겨 소리를 냈다. 펑퍼짐하게 만든 돌방은 아카시아 나무 아래 만들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그늘이 졌다. 돌방에는 간혹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친구들이 오면 강둑너머 강물에 수영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놀기도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가 찾아오기도 했는데 그 친구들은 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처음 듣는 얘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어이쿠"
  아버지가 아궁이에 소죽을 끓이면서 방 구들목이 따뜻해지자 다시 새벽잠에 빠져들던 나는 일순간 무슨 큰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방문을 열고 급히 굴뚝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자 아버지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신음하고 계셨다. “아부지“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역시 소죽을 끓이시던 윗집 아저씨가 황급히 뛰어나와 아버지를 부축하여 사랑방에 뉘었다. 골절정도의 부상이었을 텐데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병원에 가시지 않으신 것 같았다.
  골절을 그냥 방치하였으니 통증이 심하고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이웃 동네에 있는 용하다고 소문이 나있는 돌팔이 한의사가 지어준 한약을 지어 잡수셨는데 낫지 않고 점점 병이 깊어 갔다. 민간요법으로 여러 가지 약제를 섞어 환으로 만든 약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어디에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화장실 인분을 떠다가 아버지에게 갔다 주셨다. 아버지가 어떻게 인분을 드셨는지 나는 본 적이 없지만 그 이후에도 어머니는 한동안 화장실에 가셔서 그릇에 무엇을 담아 나오셔서 부엌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친척이 뱀을 잡아오시면 어머니가 뱀을 가마솥에 넣어 푹 삶아 아버지께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은 어머니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깊어만 갔다. 그래서 다치신 이후로 농사일은 어머니와 누나와 나의 몫이 되었다. 봄이면 모내기하러 논에 가야 했고 콩밭 매러 밭에 가야 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콩밭 매는 속도가 나보다 늘 빨랐다. 한 이랑을 먼저 매고 뒤따라오는 나의 이랑을 매어주곤 하였다. 나는 보리타작 할 때와 벼 타작 할 때도 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콩을 심어서 어느 정도 콩이 자라면 콩 북주기를 해야 한다. 북주기는 소 쟁기를 콩 이랑에 골을 타면 흙이 콩뿌리를 덮어 북주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쟁기를 지게 얹어 짊어지게 하고 밭에 가자고 하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창백하였고 눈에는 힘이 없으셨다. 소를 콩밭에 몰아넣고 쟁기를 달아 골을 타보라고 하셨다. 무거운 쟁기는 어린 나에게는 힘에 겨웠다. 소 멍에에 쟁기를 달고 콩밭으로 들어섰다. 잘못하면 콩이 다 쓰러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무거운 쟁기를 들고 콩 이랑을 따라 소를 몰아야 한다. 그러나 소는 생각대로 가주지 않았다. 콩 이랑을 이리저리 갔으며 빨리 가기도 하고 느리게 가기도 하며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쟁기질을 하였다간 콩을 모두 쓰러뜨릴 것 같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실망하시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나는 소가 나에게 길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말을 안 들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를 몰고 산으로 올라갔다. 소고삐를 짧게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 소를 굵은 회초리로 때리기 시작했다. 굵은 회초리를 내려칠 때마다 소는 뛰며 발버둥을 쳤다. 나는 굵은 회초리로 내려치며 “이놈의 새끼 말 들을래 안 들을래” 하며 고함을 질렀다. 소가 힘이 없어 움직임이 더디어질 때까지 회초리로 내려쳤다. 소의 눈은 온순해졌으면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소를 풀고 집으로 돌아와 소죽을 끓여 먹였다. 그리고는 소의 목을 감싸고 두드려 줬다. 그 사건이 있고 난 후부터 소는 나에게 온순해졌으며 나는 콩밭을 갈 수 있었다.
 
   문경새재 길 조령3관문이다. 조령3관문의 휴게소에 젖은 옷을 말리며 라면 한 그릇으로 몸을 녹인다. 조령3관문을 뒤로하고 마패봉으로 향한다. 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걸어놓고 쉬었다는 마패봉 정상은 아담하지만 주변의 풍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큰 정상석이 우뚝 서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답게 능선 곳곳에 산성터 흔적이 남아 있다. 곧게 뻗은 낙엽송이 산성과 묘한 조화를 이룬 동문암을 지나 부봉 삼거리에 올라선다. 6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부봉은 대간 주능선에 살짝 비켜 있다.
  백두대간의 줄기가 손을 흔든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건 포암산이다. 낮은 암릉 줄기인 탄항산 너머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바위들이 포개진 것 같은 바위틈에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
  탄항산은 월항 삼봉이라고도 불리는데 동쪽 기슭에 달목(月項)이란 동네가 있다.
  하늘재는 하늘에 맞닿아 있는 것 같지만 해발 525m에 불과하다. 충북 충주시와 경북 문경시을 잇는 포함산과 탄항산 사이에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자리한다. 삼국사기에 하늘재는 옛 이름이 계립령(鷄立嶺)이며 죽령보다 2년 앞선 신라초기 아달라니사금 때인 156년에 고개가 열린 기록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죽령보다 2년 앞선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영토 다툼을 벌일 때 신라 아달라왕은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하늘재를 개척했다.
  하늘재는 당시 한반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삼국이 대치하고 있는 접경지역에 위치한 이 고갯길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대였다. 또한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가 신라로 유입되던 통로이기도 했다. 하늘재는 오랜 세월동안 영남지방과 충청 이북지역으로 교역이 이루어진 남북 무역의 교역로이기도 했다.
  신라가 멸망하고 마지막 임금이던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그의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서라벌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오누이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한 교두보였던 이 하늘재를 이제 패망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었다. 그들은 하늘재를 넘고 미륵재에 멈춰 신라의 부흥을 기원했다. 그곳에 마의태자는 미륵 입상을 세우고,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한 후 오랜 세월을 기도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내세는 오지 않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던 마의 태자는 결국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
  영남에서 충청도, 경기도로 가기 위해 제일 많이 이용됐던 이 길은 조선 태종14년(1414)문경 새재 길이 새로 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충주시 수완보면 미륵대원지에서 하늘재까지 약 2km에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키 큰 아름드리나무들로 숲이 우거지고 잘 정비되어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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