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 25구간

머투리 2023. 4. 11. 14:02
백두대간 북진종주25구간
산행일자2023년 4월 9일(일요일)
산행코스안생달-작은차갓재-황장산-페백이재-벌재-문복대-저수령
도상거리14.3km
실제거리14.3km
산행시간8시간 30분(휴식시간포함)

 
  백두대간 버스가 지난번 하산 길에서 오미자 막걸리로 취했던 안생달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7시 30분이다.
   산(山)과 달(月)만 보이는 깊은 산골이라 하여 ‘산달’이라 불렸던 것이 ‘생달’로 변했다고도 하며, 이곳 계곡에 떨어져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여 ‘생달’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생달이 중 안쪽에 있어 안생달 마을로 불리고 있다.
   탄광이 세월이 흘러 와인동굴이 되었고, 탄광촌 주민들은 이제 대부분 오미자 농사를 짓는다.
   와인 동굴앞 주차장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배낭을 메고 스틱을 꺼내는 손길이 여유롭다. 안쪽 마을인 안생달 마을의 고도가 595m, 고도 150m만 올리면 백두대간의 주능선이다.
  오른쪽 포장도로를 계속 오르면 와인 동굴이 나오고 낙엽송 숲으로 들어선다. 기온이 한결 올랐으나 낙엽송에서 떨어진 갈색 잎은 봄과 타협하지 않을 듯 켜켜이 쌓여 쓸쓸한 가을의 무늬를 띄고 있다. 낙엽송 숲은 타협하지 않는 곧은 뜻을 긴 세월동안 켜켜이 쌓아 올렸다.
 
    백두대간 종주의 꿈을 안고 대간의 능선을 올는지 일 년, 땀으로 젖은 옷이 온몸을 친친 감기듯 달라붙던 한여름의 백두대간 능선 길과 살을 에는 차디찬 겨울의 새하얀 눈 덮인 대간길이 이제는 떠나기 싫은 겨울아침의 아랫목 같다.
   연분홍색의 진달래꽃과 진한 보라색의 제비꽃이 아니라면 아직 봄을 실감하지 못하는 숲속은 산 꾼들의 발자국 소리만 가득하다.
   양쪽으로 철 난간의 안전시설 때문에 맷등바위의 날카로운 칼날의 능선을 편하게 걷는다. 비법정구간의 버려진 등산로와는 달리 잘 정비된 법정구간을 걷는 것은 행복하다. 백두대간의 비법정구간이 법정구간이 되고 안전시설이 완비되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맷등바위의 데크 전망대에서 소백산 연화봉 천문대가 또렷하게 보인다.
   

황장산 정상에서


   맷등 바위의 철 난간을 지나 잠시 숲속을 헤치고 올라서니 황장산 정상이다. 황장산 정상은 넓은 공터에 벤치까지 놓여 있다. 황장목의 금단의 산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황장목은 없다. 아니 소나무 대신에 참나무만 온 산을 가득 드리웠으며 간혹 등 굽은 소나무만 황장산을 지키고 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고 했던가.
   

감투봉 표지


   황장산은 묵언의 산이다. 숲은 바다 속처럼 고요하다. 평범한 산세지만 지극히 차분한 기류, 오랫동안 금단의 산으로 묶였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잊힌 왕실의 기품을 실은 솔향기 머금은 바람은 한때 “봉산(封山고)”으로 대접받던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조선 왕실에서 사람의 출입을 금지했던 황장산이다.
   예로부터 큰 키로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곧게 뻗은 소나무의 공식 품종은 금강소나무이며, 춘양목(春陽木), 황장목(黃腸木)으로 불렸다. 조선 왕실에서 벌채를 금하는 '황장봉산'을 지정해 관리했다. 왕실의 건축 재료로 황장목을 쓰기 위해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던 산인 것이다. 황장산이라는 산 이름도 그렇게 유래 되었다. 쓸모없어 보이는 나무가 살아남아 산을 지켜왔다. 쓸모없음이 쓸모없지 아니했던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함을 뜻하기도 한다.
   정상에서 오랜만에 백두대간 인증을 하고 황장산에서 잠시 내리막의 계단을 내려서니 철책으로 막아놓은 백두대간의 비법정구간이 나타난다. 비법정구간 임을 알리는 철책 사이를 넘어 잠시 암릉을 걸으니 감투봉이다.

로프없는 암릉구간


    감투봉에서 시작되는 내리막길은 상상도 못했던 위험한 구간이다. 안전시설은 없고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뿌리가 대간꾼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을 뿐이다. 위험한 암릉구간을 지나면 또 다른 암릉구간이 안전시설 없이 버티고 있다. 두 손과 두 발도 모자라 엉덩이까지 내어주고 나서야 겨우 내려설 수 있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는 국민학교 때와는 다르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부를 안 하면 금방 뒤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병이 더 깊어져서 거의 방안에만 계셨다. 그래서 더욱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는데 국민학교때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 했다.
   한 달에 두서너 번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 했다, 누나가 있는데도 내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병원과 파티마 병원에 모시고 가야 했다. 어느 병원에 어느 과로 모시고 가는지도 모두 내가 결정해야만 했다.
   공부할 시간도 없이 중학교 첫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공부하고 어둑해져서야 집에 들어갔다. 그러면 늦게 온다고 어머니는 늘 야단이셨다. 저녁에는 호롱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호롱불은 어두워서 책 가까이 호롱불을 놓고 공부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콧구멍이 새카맸다.
   일요일이면 공부할 책을 싸들고 뒷산에 올라갔다. 책을 펴고 풀밭에 앉아 공부하면 개미떼가 달려들곤 했다. 때로는 돌을 깔아 자리를 만들고 공부하는가 하면 나무 등걸 위에 걸터앉아 공부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다치신 이후로 나에게 점점 더 큰 짐이 지워지고 있었지만 중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일요일에는 학교의 빈 교실에서 공부가 허용되었다. 시험이 코앞으로 닥친 일요일 아침이면 들에 일하러 가자고 성화이신 어머니께는 학교 선생님이 학교에 오라 하시다고 거짓말을 하고 혼자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배가 고파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때 까지 공부를 했다. 일요일이라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주지 않으시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할 수 없이 집에 갈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일찍 집에 와서 일을 도와라고 도시락을 싸주지 않으셨는지 모른다. 집에 오면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들에 가서 일을 도왔다. 어머니는 나를 큰 일꾼이나 되는 것처럼 나를 농사일을 이것저것 시키셨다. 사과밭에 약치는 것부터 경운기로 논밭 갈기, 쟁기로 콩밭 북주기, 소 먹이기 등 일은 끝이 없이 없었다.
   중학생이 되자 나는 더욱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농사일과 학교공부와 아버지를 병원모시고 가는 일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나는 스스로 아버지의 치료 방향을 결정해야 했으며 나의 진로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늦은 봄은 나른했다. 아카시아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이 일렁일 때 마다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작은 언덕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 바람은 이따금씩 더운 공기를 몰고와서 나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개울물은 불어나기 시작했으며 붉은 지느러미를 한 물고기들이 물 표면으로 작은 파도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산에서 나는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가뜩이나 나른한 나를 더욱 나른하게 한다. 어른들은 바쁜 들일로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렸다. 그러나 산위의 소들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강변 자갈밭에는 종달새가 바쁜 몸놀림을 하며 출산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낸다. 나는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미루어 왔던 학교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이 다가오면 평소에 예습과 복습을 안 한 것이 항상 후회가 되었다.
 
    조망이 트이는 암릉 지대를 지나 폐백이재를 내려서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 내려서야 하는데 직진을 했다가 앞서가던 대원이 황급히 되돌아오고 있다. 잠시 알바한 구간을 되돌아 폐백이재를 내려서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비법정구간이라 이정표가 없어 폐백이재를 모르고 지나쳤다. 내리막을 내려서니 벌재의 동물 이동통로 위를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초소가 하나 보이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벌재는 문경 동로면 적성리의 한자 표기가 붉을 ‘적赤’인데, 붉은 고개를 이곳 사람들이 ‘벌겋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해발 590m로 낮은 고개인 탓에 접근이 쉬워 일대의 나무를 때감으로 벌목해 붉은 흙이 드러난 민둥산 줄기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벌재의 초소를 피해 왼쪽 능선으로 올라선다. 곧게 뻗은 낙엽송의 붉은 솔잎이 바닥을 메워 발 디딤이 푹신하다. 발의 푹신한 촉감이 부드럽게 온몸을 만져주는 듯하다. 백두대간을 가고 있을 뿐인데 산은 우리를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조망이 아쉽긴 하지만 간간히 탁 트인 조망도 있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 산이 없는 것이 아님을 산 꾼들은 우직한 걸음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문복대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는다. 문복대인 듯한  봉우리를 몇 개 넘고 나서야 복을 불러오는 문의 뜻을 가진 문복대(門福臺) 정상에 섰다. 문복대 정상에는 소박한 정상석이 있다. .
 

복이 들어오는 문 문복대


   문복대 정상에 서서 복을 기원하고 백두대간의 능선에 다시 몸을 싣는다. 앙상한 가지는 아직 봄이 아님을 말하지만 곳곳에 봄꽃들은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멀리 저수령과 다음 구간인 촛대봉이 보인다.
 
   긴 낙엽송 군락지를 지나고 끝이 없어 보이는 작은 봉우리를 몇 개 넘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야 저수령 내리막길이다.


  저수령(850m)에는 큼직한 표지석과 폐업한 주유소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 넓은 공터에 매점과 주유소와 화장실을 지어놓았으나 모두 폐업하고 문을 닫아 놓았다. 넓은 공터에서 오늘의 힘든 대간길을 뒤돌아본다. 대간길에서 나는 힘을 쓰고 가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고 간다.
 

'백두대간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제 27구간  (0) 2023.05.03
백두대간 제 26구간  (0) 2023.04.25
백두대간 제 24구간  (0) 2023.03.27
백두대간 제23구간  (0) 2023.03.14
백두대간 제 22 구간  (0) 2023.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