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 24구간

머투리 2023. 3. 27. 22:43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 당시 한반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던 하늘재에는 우리 백두대간 원정대의 분주함뿐 적막하기만 하다.
 
  

슬슬하게 서있는 하늘재 표지석

 7시 40분 포암산의 흰 바위산을 바라보며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암벽구간이 나타난다. 등산 초입부터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암벽을 오른다. 가파른 오름길이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키며 천천히 호흡을 조절한다. 들머리를 지나온 지 20여분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주위의 돌을 주워 가만히 올려놓고 무사산행을 기도한다.
   들머리를 지나 1시간여의 가파른 오르막을 숨을 몰아쉬며 오른 끝에 포암산 정상에 도착한다.
  

포암산 정상 조망이 아쉽다

짙은 운무로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로프구간을 내려서자 푹신한 육산의 대간길이 이어진다. 만수봉 갈림길에서 비탐구간(비법정 탐방구간) 목책을 넘어 오르막이 이어진다.
   갑자기 등산로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지만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너머에서 우리 원정대로 보이는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 그리로 방향을 잡고 내려선다. 대간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차린 것은 갈림길을 한참 지나오고 난후였다. 아뿔싸, 오늘 후미로 힘겹게 따라 가고 있는데 알바(계획된 코스를 본업이라 전제하고,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고 다닌 길을 부업을 하였다는 뜻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해서 줄여 “알바”라고 부름)까지 하다니!
   오늘은 포암산 암벽구간을 타는 바람에 후미(後尾)가 된 이후 계속 후미다. 더군다나 꼭두바위봉 가기전의 갈림길에서 알바까지 했다.
  

꼭두바위봉



  후미를 벗어나려는 욕심을 버리는 순간부터는 자유로워지고 널널해진다고 하지만 후미는 두가지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첫째는 혼자 뒤쳐져 걷다가 알바를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먼저 도착한 분들의 차가운 눈총을 받을까봐 이다. 그러나 후미에서는 서두르지 않아 좋다.  또한 우리 백두대간  원정대 대원들은 마음이 넉넉하다.  대간길은 멈추지 않으면 된다. 후미는 빨리 걷지 못해서 후미가 되고, 선두는 느리게 걷지 못해서 선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욕심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진다.
 

크게 아름다운 산


  하늘재에서 6시간 40여분 만에 대미산에 도착한다.
   대미산은 “크게 아름다운 산(大美山)”으로 표기하지만 산경표에서는 눈썹먹“대(黛)”, 눈썹 “미(眉)” 자를 써서 “검은 눈썹의 산(黛眉山)' 이라고 적고 있다. 용하구곡에서 오르는 능선길에 대미산은 부드러운 눈썹의 형태로 보인다고 한다.
   백두대간이 설악, 오대, 소백산을 지나 죽령을 만들고 도솔봉(1,077m)을 일으키며 달려 이곳 대미산을 지나서 하늘재, 문경새재, 이화령을 두고 희양산, 속리산을 지나 멀리 백두대간의 발길을 지리산으로 돌리고 있는 곳에 아주 젊잖게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산이다. 그러나 흐린 날씨 탓에 조망이 좋지 않은 게 아쉽다.
   대미산을 지나면 편안한 육산길이 이어지지만 920봉, 986봉, 927봉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은 백두대간이 결코 만만치 않은 대장정임을 일깨워 준다. 끝이 없어 보이는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고 나면 또 다른 오르막이 버티고 있다.
   아버지가 다치신 이후로 나는 전과 확연히 다른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농사일을 도와야 했으며 집안에서도 소 외양간의 소 거름퇴비를 꺼내야 했으며 정낭의 똥물을 퍼내야 했다. 소 외양간의 소 거름은 짚과 소 배설물이 섞여있어서 무거웠다. 소 거름을 쇠스랑으로 꺼내어 리어카에 싣고 거름무더기에 얹어놓는 일이다. 소 외양간의 냄새나고 질퍽거리는 소 거름을 꺼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정낭의 인분을 퍼낼 때는 냄새 때문에 누나들과 동생들은 방문을 꼭 닫고 있거나 이웃집에 피신해 있었다. 어린 나에게 인분 통은 무거웠으며 힘에 겨워 옷에 인분을 묻히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힘들어 하는 나를 안쓰러워하거나 수고하였다고 하시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그깟 일 가지고 뭐 그리 힘드냐는 표정이셨다. 냄새는 온몸에 베여 씻어도 몸에서 냄새가 났다. 지금처럼 따뜻한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겨울인데도 개울에 가서 몸을 씻어야 했다. 그러나 일을 다 하고 나면 마음이 개운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를 나의 막중한 책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되자 전과가 필요했다. 교과서만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시험 준비는 더더욱 힘들었다. 전과에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전과를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기성회비도 제때 못내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기성회비를 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미리 말을 하지 않고 학교 갈 때 말을 한다고 쫓아서 보내기 일쑤였다. 그럴 때는 학교 가는 척 가다가 중간에서 놀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담임선생님이 기성회비 가져오지 않았다고 집으로 다시 보내기 때문이다.
   몇몇 아이들은 모든 과목의 풀이와 해석이 자세히 쓰여 있는 전과(全科)를 가지고 있었는데 숙제를 하거나 시험을 볼 때는 전과가 있어야 했다. 나는 전과가 없었다. 숙제가 있거나 시험을 치거나 하면 전과를 며칠씩 빌려서 봤다. 갖고 싶어 했던 전과를 6학년 마칠 때 까지 가질 수 없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는 중학교 입학시험공부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도 중학교 입시공부를 시켰는데 입시공부는 정규수업이 끝나고 과외로 하였다. 입시공부는 일주일에 한번 대구에 있는 사대부국의 학교 시험문제를 가져와서 시험을 치고 풀이하는 정도였다. 처음 접하는 사대부국의 시험문제는 대단히 어려웠지만 차츰 적응이 되었다. 과외를 마치면 깜깜한 밤이 되었다. 그래서 과외 하는 학생들의 집에서 볏 집에 불을 붙여 마중 나오기도 했다. 중학교 입시공부를 했지만 영천이나 대구의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가정형편도 안되었지만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공부를 어디까지 이어갈지 농사를 지을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시골 중학교에 떨어지는 학생은 몇 명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 정원 외로 합격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합격해도 등록금을 못내는 학생들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큰 누나는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우리 집 마당에서 했다. 매형 되는 새신랑이 우리 집 앞까지 택시를 타 고와서 내리는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신랑인 매형은 머리에 검은 사모를 쓰고 단령포를 입고 그 위에 관대를 두른 모습이 어색하였다. 마당에는 구경꾼들로 꽉 들어차고 부엌에는 음식을 하느라 분주하였다. 대문에 들어온 신랑을 멈추게 한 것은 삼촌이었다. 들어오는 신랑을 멈추게 한 후 짚단에 불을 붙여 그것을 밟고 들어오라고 하신다. 예정에 없던 것인지 주변이 잠시 소란하다가 신랑이 멈칫하다가 불이 붙은 짚단을 밟고 걸어 들어오자 웃음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아마 악귀를 쫒는 의식인 듯하였다.
   신랑이 들어오자 혼례집례(婚禮集禮)가 “신랑취대대례청”하고 외치니 큰고모님이 신랑을 암탉과 장닭(수닭)이 보자기에 싸여 놓여있는 높은 상 앞으로 이끈다. 신랑 동향립(東向立 )하니 큰고모님은 신랑이 동쪽을 향해 서도록 이끈다. 신부출(新婦出)하니 일제히 안방문으로 구경꾼들의 시선이 머문다.
   이윽고 신부가 안방 문지방을 긴 치마를 두 손에 잡고 힘겹게 넘는다. 신부인 누나는 앞마당에서 서쪽으로 서고 신랑인 매형은 대문을 들어와 신부 앞에 서서 식을 올렸다. 둑담에는 동네사람과 친척들이 둘러섰다. 신부인 누나는 얼굴에는 연지곤지를 찍고 긴 청홍 치마에 저고리와 붉은 색의 활옷을 입고 머리에는 족두리를 썼다.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두 갈래로 늘어뜨린 금박으로 글자를 새긴 댕기를 늘어뜨리고 서있는 큰누나의 모습은 딴 사람같이 예뻤다.
   이어서 신부재배 신랑답일배 후에 신부가 술을 따르면 고모가 신랑에게 술잔을 건네 신랑이 받아 마시고 신랑이 잔을 따르니 고모가 신부에게 술을 건네 마시게 하셨다. 이렇게 진행된 결혼식이 끝나고 사랑채에는 웃손으로 오신 사장어른과 같이 오신 친척 분들을 모시느라 분하다. 안방으로 안내된 신랑과 신부는 음식이 잔뜩 차려진(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큰상 앞으로 앉게 하였다. “야야 신랑한테 술 한 잔 따라 줘라“ ”하하하”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리고 신랑과 나이가 비슷한 친척들은 신랑을 직들이겠다고 발을 묶어 발바닥을 대나무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 그러면 신부인 누나는 “마 그만 하이소” 하며 손 사레를 쳤다. 장난은 격렬했으며 신랑인 매형을 죽일 것 같았다. 그러나 매형도 지지 않았다.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때로는 술을 권하며 친척들을 진성시키기도 했다.
  이런 놀이는 저녁 식사시간에 잠시 조용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이제 누나와 매형을 신방인 멀방으로 보내라고 야단이시다. 밤이 늦어서야 신랑과 신부는 신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장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새롭게 바른 문종이를 뚫고 들여 다 보기 시작했다. 나는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드디어 나타난 남한 내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웅석봉에서 시작된 우리원정대의 대간길이 절반을 지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간길이 남한 내 중간지점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다. 하루 빨리 백두산에서 지리산 까지 백두대간의 길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차갓재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접속구간의 길은 낙엽송 군락지가 길게 이어지다가 한적한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연이어 안생달 마을이 나타난다.
   대미산과 황장산 사이에 자리 잡은 안생달은 문경에서도 최북서쪽에 위치하는 오지 중의 오지이다. “생달리” 는 “산다리”에서 유래 되었다. “산다리”는 산과 달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두메산골이라는 뜻이다. 그“산다리”가 “생달이“로 변음 하였고 ”생달이”중 안쪽에 있어 “안생달”로 불리고 있다.
   안생달 마을에는 신맛, 쓴맛, 매운맛, 단맛, 짠맛의 다섯가지 맛이 난다는 오미자밭이 많이 있다. 그래서 마을에는 오미자 막걸리 양조장이 있다.
 

'백두대간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제 26구간  (0) 2023.04.25
백두대간 제 25구간  (0) 2023.04.11
백두대간 제23구간  (0) 2023.03.14
백두대간 제 22 구간  (0) 2023.02.28
백두대간 제21구간  (0) 2023.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