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20구간

머투리 2023. 1. 30. 22:19

늘재에 도착한 것은 새벽 6시30분이다, 이번의 대간은 며칠간의 한파 주의보의 날씨에 걱정을 많이 했다. 추위에 대비하여 핫팩벙어리 장갑과 넥워머를 구입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깜깜하다. 해드랜턴을 켜고 산행준비를 한다. 문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간단한 체조를 마치고 늘재 백두대간 상징석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대간길을 시작한다.

늘재에서 20구간 기념사진

염려하던 추위는 아닌 듯하여 다행이라 생각된다. 해드랜턴을 켜고 눈이 살짝 덮인 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진행한다. 대간 산행기를 보면 이곳에 성황당이 보여야 하나 어두워서 그런지 보이지 않는다.
지난 구간에서 문장대-밤티재의 암릉 구간의 아찔하고 황홀한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다. 오늘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면서 어두운 대간길을 시작한다. 비교적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걸으며 오늘의 대간길을 가늠해 본다.
늘재에서 청화산(984m), 조항산(953.6m), 대야산(930.7)에 이르는 세 번의 큰 오르내림이 있는 구간이다. 오른쪽에 일출의 붉은 기운이 비치더니 그 기운은 금방 사라지고 찬바람이 불어온다. 길옆에 서서 넥워머와 핫팩 벙어리장갑으로 무장한다. 그사이 뒤따라오던 대원들은 수 없이 지나간다. 추위에 단단히 무장을 했으나 이네 다른 복병이 나타난다. 뜨거운 입김이 나오자 안경에 성에가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불편하지만 참고 걸어보지만 앞이 안보이니 할수 없이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한 시간여 정국기원단 재단이 보여야 하나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이제 눈이 제법 쌓여 있어 미끄럽다. 아이젠을 착용한다. 손이 곱아 아이젠 착용도 쉽지 않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아이젠을 착용한다. 겨울 장비를 몇번 착용하고 벗는 사이에 후미 대원들만 남았다. 가파른 암릉구간을 밧줄을 잡고 몇 번을 오르니 앞서가던 대원이 사진을 찍고 있어 물어보니 청화산이란다. 청화산


청화산 정상에서

표지석이 앙증맞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늘재의 잠룡이 승천하는 형국이라는 청화산은 부드러운 능선과 칼날 같은 암릉이 적절히 섞여있다. 정상에서 멀리보이는 속리산 주능선이 연필로 그린 소묘(小錨:dessin) 같이 아름답다.


비록 풍수를 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도 여기서는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청화산이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화산의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다.
“청화산은 내외 선유동을 등에 업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하여 앞뒤의 수석이 기이 절묘함이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이 높고 크며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이 험준한 곳이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려 있는 돌이 모두 맑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 모양이 단아하고 평탄하여 좋으며 수려한 정기가 노출되어 가려진 것이 없으니 자못 복지(福地)라 하겠다.” 청화산을 이렇게 극찬하며 이중환은 스스로의 호를 “청화산인”이라 지었다.
이렇게 극찬한 청화산도 지금 나는 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추워서 넥워머와 장갑을 착용하면 덥고 벗으면 춥다. 이렇게 장비를 바꾸는 사이 대원들은 하나 둘 나를 따돌리고 지나가 버렸다. 청화산을 내려서는 길은 미끄러운 암릉길이다. 몸을 비틀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암릉구간이 있는가 하면 아찔한 절벽 구간도 나타난다.

조항산 정상석


이렇게 암릉 구간과 겨루며 걷다 보니 조항산이 조용히 우리를 반긴다. 조항산 정상에 서면 마치 하늘위에 오른 기분이다. 한겨울의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소묘(小錨)처럼 뚜렷하고 아름답다. 바위위에 정상석이 마귀할멈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마귀할멈바위가 조항산 뒤쪽의 언덕에 우두커니 조항산 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할멈바위


조항산을 내려오면 고모치(고모령)다. 이곳은 경북과 충북을 잇는 12km가 되는 험준한 재로 옛날 이곳에 고모와 홀로된 질녀가 살았다 한다. 어느 날 질녀가 병사하자 고모가 이를 애달프게 여겨 식음을 전폐하고 고개에 올라 질녀의 이름을 부르다 쓰러져 죽자, 후세 사람들이 고모의 넋을 달래기 위해 고모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고모치 바로 아래에 고모샘이라는 약수가 있다.
고모치를 지나 계속오름길, 멀리 마귀할멈 바위의 위용이 대단하다. 추위와 바람 때문에 먹지 못하던 점심을 먹는다. 오후 1시가 넘었다. 이런 속도라면 오늘의 비법정 구간을 가지 못할 것이라고 문대장이 걱정한다. 오늘 추위 때문에 장비를 입고 벗는 사이에 또한 문대장과 같이 라면을 끓여먹는다고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 나도 정말 아쉽지만 대야산-버리기미재구간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밀재를 지나 대야산 오르는 길은 계속 가파른 나무 계단이다. 수많은 오르내림과 무거운 장비 때문에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걸음이 느리지만 멈출 수가 없다.

숨이 막힐 듯 솟아 있는 대야산의 위용에 비해 우리 마을의 뒷산은 얕고 부드러워 사람들의 접근이 쉬웠다. 그래서 뒷산에 가서 쉽게 나무를 할 수 있었다. 땔감 때문에 산들은 민둥산이 되었다. 민둥산은 물을 저장해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조금만 비가와도 홍수가 난다. 여름에 많은 비가 오면 골짜기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합쳐져서 높은 파도처럼 구르면서 내려온다. 이 물에 휩쓸리면 금방 물에 휩쓸린다. 큰물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강은 반들반들한 돌과 맑은 냇물로 채워진다. 그러면 개울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로 채워지고 아이들의 고함소리와 다이빙하는 소리가 가득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언덕의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서로 경쟁을 한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뛰어 내리는 곳보다 두 배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뛰어 내린 적이 있다. 내가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을 때 아이들은 나를 쳐다보며 일시에 조용해졌다.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뛰어 내려야 했다. 저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발가벗은 내가 공중에서 곤두박질하며 깊은 물속으로 돌진했다.
“풍덩“
눈을 뜨니 어둑해진 저녁 무렵이었다. 주위는 아무도 없고 물 흐르는 소리만 났다. 몸을 일으키니 배가 몹시 아프다. 겨우 몸을 일으켜 배를 움켜쥐고 집에 들어와 저녁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외면 한 채 쓰러져 잤다.
겨우내 얼었던 물이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차갑다. 학교가기 위해서는 개울을 건너야 한다. 저마다 고무신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개울물에 들어가면 발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차가웠다. 학교 등굣길에 차가운 냇가에서 세수도 해야 하고 발도 씻어야 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용의 검사가 있기 때문이다. 겨우내 씻지 않은 발과 손은 늘 부르터 있었다.
그러나 하굣길은 늘 즐거웠다. 친구들과 자치기와 구슬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또한 하굣길에서 개울건너 어두컴컴한 언덕의 움푹 파인 구멍에 앉아있는 부엉이와 마주치기도 하고, 개울의 자갈밭에서 높이 치솟아 지저귀는 종달새를 아래 종달새 알을 줍기도 하고, 풀숲에서 갑자기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르는 까투리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은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개울가의 종달새는 둥지위에서 하늘 높이 솟아올랐으며 솟아오른 종달새 아래에 가면 종달새의 알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언덕의 움푹 팬 곳에는 부엉이가 있었는데 내가 가까이 가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때는 무섭고 두려웠다. 봄에는 응달진 산에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었으며 들과 산은 새싹들로 푸르렀다.

봄이 오면 어른들도 바빠지지만 아이들도 바빠진다. 집집마다 송아지나 소를 한 마리 이상 키웠는데 겨울에는 볏짚을 작두로 잘게 썰어 넣고 쌀이나 보리를 찧고 나온 겨를 물과 같이 넣어 가마솥에 소죽을 끓여 소를 먹인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작두를 밟으라고 하신다. 아버지가 볏짚을 작두에 적당한 길이로 넣으면 나는 발로 밟아 볏짚을 잘라 소죽을 끓이는 것이다. 하지만 봄이 되면 볏짚이 없기 때문에 소꼴을 뜯어 소죽을 끓인다.
봄이 어느덧 가고 여름이 성큼 다가오면 산과 들에 풀로 뒤덮이면 동네 형들을 따라 동네 뒷산에 소 먹이러 다녔다. 오전에는 대부분의 소는 밭을 갈거나 논을 간다. 오후가 되면 어른들은 소를 동네 당산나무에 묶어둔다. 당산나무는 나이가 얼마인지 아무도 몰랐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내가 어릴 적에도 당산나무는 지금과 같았다고 했다. 당산나무는 뿌리가 땅위로 이리저리 뻗어 있어서 당산나무 뿌리에 소 이까리(고삐)를 맸다. 오후가 되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당산나무 아래에 묶어둔 소이까리를 풀고 산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소를 몰고 간다. 길게 늘어선 소의 행렬은 산까지 이어졌다. 방목할 곳에 도달하면 소이까리를 소뿔에 단단히 감아 산골짜기에 풀어 놓는다. 소들이 이졸짜기 저 골짜기로 흩어지면 여자아이들은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남자아이들은 씨름, 말뚝 박기, 고상박기, 자치기놀이를 했다. 고상박기는 서로 맞붙어 항복을 받아내는 놀이였다.
나무가 없는 민둥산은 어린 내가 뛰어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작은 봉우리들을 순식간에 뛰어 올라가서 아래로 손살 같이 뛰어 내려오기도 했다. 소를 몰고 천천히 내려오면 억새풀과 속새풀, 쑥부쟁이 등의 풀이 지천으로 있었다. 풀을 손으로 뜯어서 던지기도 했으며 돌을 발로 차기도 했다.
산등성이 곳곳에는 6.25 한국전쟁 때 파놓은 참호들이 많이 있었다. 이곳은 보현산에서 영천으로 들어가는 35번 국도가 지나가는 지역으로 인민군이 영천을 점령하고 국군이 영천을 다시 탈환하였던 영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인민군은 1950년 8월 다부동 및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인민군 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다. 보현산까지 진출한 인민군은 영천을 점령하여 대구 및 경주로 진출하려 했다. 인민군이 영천을 점령하여 대구로 진출할 경우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위험에 처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경주로 진출할 경우 마지막 교두보인 부산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인민군은 9월5일 영천을 3개 방면으로 공격을 해왔다. 이 공격으로 국군 제8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영천읍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에 국군은 1사단과 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 병력을 차출하여 병력을 재정비하여 9월10일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15사단의 전차 및 화포를 대부분 파괴하고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인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참호들은 인민군이 파놓았는지 국군이 파놓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참호 속을 파 해치면 참호 속에는 담요와 철모, 발사되지 않은 탄피와 총알, 발사된 탄피가 엄청나게 나왔다. 탄피로 딱총을 만들어 놀기도 했다. 발사되지 않은 탄피의 총알을 빼내면 그 속에 화약이 나오는데 화약을 빼내서 봉투에 담아둔다. 쇠못에 철사를 고무줄로 감아서 연결하고 탄피 속에 화약을 넣고 쇠못의 머리를 탄피 속에 넣어 딱딱한 바닥에 내려치면 “탕”하고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친구들은 저마다 솜씨를 발휘하여 더 멋지고 소리가 더 잘 나는 딱총을 만들기 위해 솜씨를 발휘했다. 대보름날이면 친구들과 각자 만든 딱총으로 딱총놀이를 했다. 정월대보름이면 산과 들에서 딱총소리가 요란했다. 골짜기에서 박격포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호기심 많은 친구들은 박격포를 두드려 보기도 했다. 한 친구는 마을 뒤뜰에 있는 대나무 밭에서 깡통모양의 수류탄을 주워 와서 수류탄을 두드렸다. 구경하는 친구들은 그것이 잘못하면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옆에서 구경하였다. 수류탄을 두들기는 동안 우리들은 누구하나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다 수류탄이 “쉬“하며 소리가 났다. 일순간 옆에 있던 친구들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나도 같이 엎드렸는데 조금 있다가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누구하나 다치지 않았다. 수류탄을 두들기던 친구가 수류탄이 쉬 소리가 나자 던져 버린 것이다. 총알이나 수류탄, 박격포뿐만 아니고 학교 가는 길에는 다 부셔진 탱크 잔해가 한동안 있었는데 인민군 것인지 국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전쟁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곳곳에 있었다. 심지어 참호에서 사람의 해골을 봤다는 친구도 있었다.
고모부님은 6.25 전쟁 당시에 일어났던 일들을 실감나게 말씀해주셨다. 호기심 많은 나는 늘 고모부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흥미 있게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 중간에 궁금한 이야기가 있으면 되묻기도 하였다. 고모부님은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해주셨다. 고모부님은 나에게 똑 같은 이야기 했는지 안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모부님의 말씀으로는 6.25 한국전쟁 때 우리 마을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마을사람들은 집안에 있는 놋그릇은 우물 속에 넣어두고 소등의 질매에 물건을 싣거나, 소 구루마에 짐을 싣고 영천시 화산면 가래실 이라는 동네에 피난을 갔다. 놋그릇을 우물 속에 넣어둔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 제사 때 쓰는 놋그릇을 강제 징벌하여 전쟁 물자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래실이 어디에 있는지 어린 나에게는 궁금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서 아주 멀리 있는 동네인줄 알았다. 그렇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동네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을이었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피난을 가래실리로 간 이유는 가래실은 큰 도로가 없는 지역이라 인민군이 들어오질 않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난을 가시지 않으셨다. 아무리 인민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지만 늙은이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겠지 하시며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인민군은 우리 동네에 총소리 한번 내지 않고 들어왔다고 한다. 인민군은 우리 동네에 들어오자마자 먹을 것을 내놔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쌀과 반찬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인민군의 짐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밤이 되면 집에 있는 쌀과 반찬을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셨으며 각종 무기를 날라다 주는 역할까지도 하셨다고 한다. 고모부님의 집이 있는 동네에서는 낮에는 국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점령하는 그야말로 쫒고 쫒기는 격전이 일어났다. 동네 젊은이들은 밤에는 인민군, 낮에는 국군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적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밤에는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으며 낮에는 국군에게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죄 아닌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된 젊은이들이 수십 명이 되었으며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부지기수이다. 아직도 그런 참상의 원인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천에서 국군의 대 반격작전에 크게 패한 인민군은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고모부님은 인민군이 사라진 후 산에서 인민군이 묶인 채 사살되어 있더라는 예기도 해주셨다.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부하 병사를 묶어두고 총을 쏘게 하여 아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던 것이다.
굴러 떨어질 듯 한 집채만 한 큰 바위들의 위용에 위축된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나무계단을 오르니 우측에 대야산이 우뚝 서 있다. 구름다리 위를 지나 대야산에 올라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을 보고 급히 피아골로 내려선다.

대야산정상석
대야산정상에서 조망

피아골의 가파른 나무계단을 지나니 곳곳에는 미끄러운 내리막 빙판길이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빙판에 미끄러지기 일쑤다. 꽁꽁언 얼음 빙판길은 아이젠도 무용지물이다. 자세를 낮추어 기어가듯 내려서는 수밖에 없다.

피아골 계곡의 얼음

월영대까지 1.9km, 월영대에서 대야산 주차장까지 4.5km를 가야한다. 오후 4시의 산은 어둑어둑해진다. 발걸음을 재촉해보지만 속도가 나지 않는다. 혼자 계곡을 내려가다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여성 산객이 따라오고 있다. 십여 미터 뒤에서
“먼저 가볼께요” 하고 소리 지른다.
“예”
길을 멀찌감치 비켜준다. 빠르게 여성 산객이 지나가니 뭔가 격세지감(隔世之感:그리 오래지 않은 동안에 아주 바뀌어서 딴 세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느낀다. 우린 적어도 앞에 산객이 길을 비켜 줄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님 길 가장자리로 돌아갔다. 월영대(달이 물속에 비친다는 소)의 얼어있는 물을 보고 발길을 재촉한다. 여름이면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하산하였겠지만 꽁꽁 얼어 물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적막하기만 하다. 계곡을 벗어나니 민박마을 나타나고 조금만 언덕으로 올라서니 주차장에 버스가 보인다. 늦은 하산에도 대원들은 한결같이 반겨주신다. 휴식시간 포함 열한시간 대간길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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