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16구간

머투리 2022. 11. 28. 10:22

제16차 대간길은 큰재(329m)-회룡재(340m)-백학산(625m)-개머리재(250m)-지기재(260m)이다. 오늘 대간 길 큰재에서 다음 대간길 화령재까지는 대간길에서 가장 편한 소위 중화지구대(中化地溝帶) 구간인데 크게 보면 지나온 추풍령에서 속리산 남쪽 화령재 까지를 말하는 이도 있으나, 이곳 상주의 공성면, 모동면, 모서면, 내서면, 화동면, 화서면 지역으로 대간길을 좌우로 감싸고 있는 지역이다. (中化란 과거 중모현(中牟縣)과 화령현(化寧縣)이었던 이 지역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지구대(地溝帶)란 가늘고 긴 폭이 있는 계곡형태의 지형으로, 침식에 의한 계곡과 달리 단층활동에 의해 생성된 낮고도 길쭉한 골짜기를 말한다. 그래서 침식지형과 달리 단층활동으로 내려앉은 지형이다 보니 토심이 깊고 비옥하여 이 곳 대간길 고개고개마다 과수원이 아주 많다.
오늘 대간길 내내 상주 땅을 밟는다. 경상도(慶尙道)가 경주(慶州)의 경(慶)자와 상주(尙州)의 (尙)자를 따와서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이 지어졌을 만큼 옛 상주는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
15차의 날머리 큰재(상주시 공성면 우하리 , 상주시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에 대간버스가 도착한 시간은 7시 이다. 간단한 체조를 마치고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을 가로 질러 들머리로 진입한다. 큰재의 생태교육장의 화장실은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 나왔었다. 아름다운 인상을 줬던 큰재를 뒤로 하고 대간길을 접어든다. 오늘 대간길은 도로를 가로지르는 길이 많아 길을 잃지 않도록 독도에 조심해야한다. 또한 낙엽이 깔린 내리막길은 미끄러우니 조심해야한다. 추울까봐 걱정이 되었으나 손끝이 약간 시릴 뿐 아침 공기는 부드럽다. 어느덧 동쪽 하늘에는 아침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아침노을

부드러운 햇살이 온몸을 어루만진다. 붉게 비추는 아침노을을 바라보며 우린 꿈을 꾼다. 아침햇살은 언제나 너그럽고 충만하다. 아침햇살에 잠시 취해있는 사이에 대간팀들은 멀찌감치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부드럽고 너그러운 대간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회룡재에 도착한다. 회룡재는 재의 모양이 용이 뒤를 돌아보는 형상을 닮아 회귀한다는 뜻으로 회룡재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회룡재을 올라서며 산세를 살펴보아도 뒤를 돌아보는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회룡마을에서 바라보았을 때 용이 뒤를 돌아보는 형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부드러운 아침햇살을 받으며 걷다보니 개터재에 닿는다.

카펫 같은 대간길

상주시청 홈페이지에는 개터재는 효곡1리 옥산전 마을의 공서 초등학교 성문 분교 남쪽에 있는 고개로서 “개 터” 는 “개 티” 로 개(邊:변)+티(峙:언덕치)+재(峴고개현)=개티재 즉 , 마을의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언덕의 고개라고 소개 되어 있다. 개터재에서 느긋하게 걷다보니 임도위로 생태통로가 놓여있다. 대간팀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백학산(615m)이다. 백학산은 백학이 날아와 앉은 모습이 마치 설산처럼 하얗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앙증맞은 정상석이 인상적이다.

백학산 정상석

백학산 아래에 앞선 대간팀들이 점심을 먹고 일어선다. 반갑게 인사를 한다.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다. 친구들이 앉았던 자리에 낙엽을 카펫삼아 점심을 먹는다.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서니 임도와 만나고 대간길 좌우로 포도밭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개머리재에 닿는다.
상주시에서는 개머리재를 다음과 같이 유래를 적고 있는데 엄청나게 난해하다. 옛말의 변천을 조사해서 지형에 맞도록 해석을 해놓은 것이다.
개머리재는 원소정에서 대포리 함박골로가는 고개. 지형이 개의 머리를 닮았다고 한다. ≪“개”를 닮았는지 “괴(고양이의 古語)“를 닮았는지, 아니면 ”개“가 다른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천가(邊)도 ”개“라한다. 여기서는 ”길(街)”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街)는 지름길을 뜻한다. “머리“는 입구나 가까운 곳을 뜻하는 ”머리”가 아니라 “몰”(山)임이 분명하다. 이곳이 백두대간이기 때문이다. 몰(말)→모리(마리,마루)→머리가 되어 개+몰(山)이→재(재) 개몰이재→개모리재→개머리재 즉 ”개머리“는 ”개몰“로 ”산을 질러가는 길” 이라는 뜻이다.≫ 해석하자면 개는 지름길이 되고, 머리는 산(山)이니까 산을 가로 지르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산행내내 이런 길

지기재 가는길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몇 차례 지난 후 마을이 보이고 우리 대간버스가 보인다. 포도밭 사이를 지나 오늘의 날머리 지기재에 닿는다.
지기재는 지기재동에서 대포리의 노산으로 넘어가는 재인데. 이 고개에 도적이 많아서 적기재라고 불리던 것이 지기재가 되었다고 한다.
개터재, 회룡재, 백학산, 개머리재, 지기재등 이름 하나하나 저마다 유래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간길은 이름 하나도 우리에게는 소중하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열쩡으로 모인 우리 7기 어느덧 식구가 되었다. 우린 모두 서로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서로 아끼며 염려하며 아름다운 산행을 이어 가리다.
정월대보름의 첫 행사는 새 쫒기이다.
정월대보름이 오기 며칠 전부터 우리 형제들은 수수깡으로 지게, 호미, 쟁기 등의 농기구와 벼이삭, 보리이삭 등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수수깡 껍질을 구부려서 형태를 만들고 수수깡에 꽂아 고정시켜 각종 모형을 만들었다.
동생과 나는 저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뽐내기도 했는데, 수수깡안경은 만들기가 편해서 너도나도 많이 만들었던 것 같다. 안경알 부분은 수수깡껍질을 둥그렇게 휘어서 위쪽반원을 만들어 수수깡 속대에 꽂아 고정하고, 아래쪽 반원도 같은 방법으로 수수깡속대에 꽂아 안경알을 만든다. 같은 방법으로 안경알을 하나 더 만들고 그 사이를 수수깡 껍질로 연결하고 양쪽 수수깡속대 중간에 긴 수수깡껍질로 연결하면 안경다리가 만들어 진다. 수수깡은 가을에 수수를 수확하고 어머니가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십 개의 수수깡모형이 만들어지면 우리 집 앞에 있는 거름 무더기 위에 꽂아 두었다. 수수깡 모형은 우리 집 거름 무더기 위가 마을에서 제일 많았던 것 같다. 친척집이나 친구네 집에는 거의 보지 못했다. 거름무더기 위에 꽂아둔 수수깡 모형은 정월대보름까지 저마다 모양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정월대보름 이른 새벽이면 어머니가 새를 쫒으라고 성화이시다. 우리 형제들은 서로 안 나가려고 자는 척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재촉 목소리는 점점커지고 문까지 활짝 열어젖히면 할 수 없이 내가 나갔다. 어머니는 새 쫓는 것은 남자인 내가 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새 쫓으러 나가는 나를 향해 큰소리로 새를 쫓으라고 하신다. 나는 긴 대나무 장대로 거름무더기위의 수수깡으로 만든 농기구나 곡식모형을 두드렸다. 장대로 두드리는 것은 타작하는 흉내를 내는 것인데 수수깡 모형은 모두 부셔지는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수수깡 모형이 덜 부서지게 거름무더기 모서리를 내리 쳤다. 동생들과 정성스럽게 만든 수수깡 모형을 부수기는 너무 아까웠다.
후여~후여~
호박 딱따 / 고두박 딱따
후여~후여~
우리 논에는 오지 말고 / 영천 이인식 논에 가거라
후여~후여~
웃녘 새는 우로가고/ 아랫녘새는 아래로 가거라
호박이나 고두박은 박을 타지 않고 꼭지 언저리에 손이 들어 갈만하게 구멍을 뚫어서 속을 파내어 말린 바가지인데 이것은 원래 각종씨앗을 보관하기 위해서 만든 뒤웅박이다. 이 뒤웅박을 두드려서 딱따, 딱따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릴적에는 호박 딱다 고두박 딱다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머니는 나에게 새 쫒는 소리를 가르쳐 주셨으나, 뜻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뜻을 모르니 새 쫒는 소리가 잘 외워지지가 않았다. 나는 혹시 이웃의 누군가가 들을까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새를 쫒고는 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정월대보름의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다.
어머니는 보름 오곡밥을 지어서 당산나무 아래에 정안수와 함께 놓고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하고 성황신에게 집안의 안녕을 빌고 오신다. 어떤 때는 나를 데리고 가셨는데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손을 비비고 절을 하셨다. 집에 와서는 호두와 밤, 땅콩과 설날의 음식인 엿콩(강정)으로 부럼 깨기를 했다. 부럼 깨기를 하면 일 년 동안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가 어릴 적에는 종기와 부스럼이 아주 많았던 것 같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 오면 목욕을 할 수 없었다. 봄이 되고 개울물이 따뜻해져야 비로소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목욕을 하기도 했지만 모든 아이들이 목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럼 깨기를 하고 나면 오곡밥과 고기반찬에 김과 피마자잎나물볶음을 차린 정원대보름 밥을 차려 주신다. 어릴 적에는 이 오곡밥과 나물이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오곡밥 또한 균형 있는 영양소를 고루 섭취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였던 것 같다.
오늘 능선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간길과 달리 낮은 구릉의 상주 대긴길을 걸으며 대간길을 개척했던 초기 답사자들에게 상주구간은 결코 쉬운 코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별다른 특징 없이 나지막하고 칙칙한 잡목 숲에서 헤맬 일이 많았을 것이고, 대간 마루금을 일관되게 잇는 뚜렷한 길이 없어 무심코 걷다보면 샛길로 빠지는 “알바”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들의 열정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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