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드림산악회 백두대간 9기 북진종주 2구간

머투리 2025. 5. 6. 09:18

백두대간 북진 2구간 (밤머리재-오봉리)
산행날짜 : 2025년 5월 3일(토요일)
산행코스 : 밤머리재(570m)-왕등재(935.8m)-왕등습지(970m)-외고개-새재-오봉리
산행거리 : 실제거리 =11.5km
산행시간 : 6시간 50분

완공 예정기간을 훨씬넘긴 생태터널공사


드림산악회 9기 백두대간 종주대는 5시 30분에 밤머리재에 도착했다. 밤머리재에는 생태터널 조성 공사로 차량 출입을 막아 놓았다.
문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체조를 하고 인증 사진을 찍고 밤머리재 산행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한다.


밤머리재- 3km - 왕등재(2시간)

오늘 백두대간 도전구간인 밤머리재에서 새재까지는 비법정(공식적으로 등산로 지정이 없는 길)구간이다. 그러나 산행 들머리에는 비법정(공식적으로 등산로 지정이 없는 길) 등산로 임에도 커다란 이정목을 세워 놓았다.
 

밤머리재 들머리 이정목


비법정 등산로에 이정목이라도 세워놓은 것은 산꾼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이정목을 세워놓은 이유가 궁금하다.
3년전에는 이정목을 세워 놓은 곳에 출입금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밤머리재-새재의 비법정 구간을 개방하려는 건지 기대가 된다.

그러나 오늘 2구간(밤머리재-오봉리)은 찾는 등산객이 많지 않아 등산로가 희미하여 독도에 유념해야한다.
산행 들머리부터 비가 오지만 이슬비 정도이다. 오늘 하루 종일 비예보가 있지만 그다지 굵은 비는 아니어서 가볍게 산행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가파른 길이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을 숨을 몰아쉬며 오르니 도토리봉(909m)이다. 밤머리재에서 0.9km, 40여분만이다.
가늘게 내리던 빗방울이 굵어진다. 숨을 고르며 우의를 꺼내 입는다.

도토리봉


도토리봉(909m)에서 북서쪽에 천왕봉 조망이 일품이지만 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천왕봉 조망은 사치이다.


지리산 동부능선

도토리봉에서 왕등재로 가는 구간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비법정구간이라 대간꾼들 이외에는 다니지 않아 등산로가 뚜렷하지 않다.

  왕등재(동왕등재935.8m)를 오르는 길은 가끔 조망터에서 오던 길을 뒤돌아 바라보면 도토리봉과 동쪽으로 왕산과 필봉산 그 뒤쪽으로 수도산 가야산 황매산의 모습이 보이겠지만 날씨가 곰탕(안개나 구름에 갇혀 시야가 보이지 않고 사골국물처럼 뽀얀 풍경)인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왕등재오르는 길에서 뒤를 바라보면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니 왕등재이다. 밤머리재에서 3km, 밤머리재에서 출발한지 2시간만이다.

왕등재 표지목


왕등재(935.8m)는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의 강력한 힘에 밀려 지리산으로 쫓겨 이곳 왕등재에서 성을 쌓고 항전하다가, 끝내는 왕산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그 왕산 아래에는 구형왕이 살았다는 궁터가 있으며 지리산 동부 자락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지난 구간의 왕재, 이번 구간의 왕등재, 그리고 구형왕릉에서 오르는 왕산, 다음구간의 국골(나라가 있었었던 골짜기)등이 가락국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왕등재(935.8m)-4.1km-왕등습지 (2시간)

  이곳 왕등재에서 왕등습지로 가는 길은 왼쪽으로 천왕봉과 지리산의 동부능선이 장엄하게 다가오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구름이 걷히며 나타나는 지리산의 형세는 더욱 장엄하다.
다음 구간의 천왕봉이 눈앞에 보이지만 천왕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크게 우회하여 쑥밭재와 국골,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올라야 한다.
 
동왕등재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이어지더니 산죽길이 나타난다. 산죽 길은 다행히 길지 않다.
서왕등재(1,045m)로 생각되는 밤머리재 5.1km, 새재마을 5.1km 이정표가 나타난다. 밤머리재를 출발한지 약 2시간 40분 걸렸다.
지도상에는 왕등재가 두 곳이 나오는데 동쪽에 있는 왕등재를 편의상 동왕등재(935.8m), 서쪽에 있는 왕등재를 서왕등재(1,045m)라 부른다.

서왕등재 이정목


능선 길 좌측으로 나타나는 천왕봉과 지리산 마루 금이 쉼 없이 구름에 감추어 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서왕등재(1,045m)이정표에서 약 한 시간 걸으니 그 옛날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군사들이 성을 쌓아 전쟁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성터가 오른쪽에 나타난다.

구형왕성터


성터에서 내리막길을 10여분 내려서면 능선 한가운데에 습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왕등재 습지이다.
고산지대에 있는 왕등재 습지는 해발 970m에 있는 너비70m, 길이200m 정도의 습지이다.
안내판에는 숫잔대, 뻐꾹나리, 사초기둥, Pinnulnaria 등이 서식하고 있다고 적혀 있지만 아직 봄이고 우리같은 비전문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왕등재습지에서


왕등재습지-2km-새재-2.5km-오봉리(2시간50분)

   왕등재 습지를 조금 지나 집에서 가지고 온 빵과 과일을 꺼내 먹는다. 어제 저녁이후 처음 음식을 먹는다.(9시 45분)

   비가 와서 판초(poncho)(옷 한가운데 구멍을 내어 그곳으로 머리를 넣어 앞뒤로 늘어뜨려 입은 중남미 인디오들이 입었던 옷에서 유래)우의를 입은 관계로 우의를 벗지 않으면 배낭에서 음식을 꺼낼 수 없어서 여태까지 배고픔을 참았다.

    산악회 대원들은 대부분 거창휴게소에서 산악회에서 준비한 아침을 먹지만 내 입에는 맞지 않아 아침을 같이 먹지 않았다.
대원들과 멀어질까봐 빵과 과일과 물을 한꺼번에 우겨 넣는다.

   또다시 산죽길이 나타난다. 지나온 산죽보다 더 크고 잎이 더 많다. 그렇지만 산죽 길은 그리 길지 않다.
앞에 거대한 봉우리가 우뚝 서서 위압하고 있다. 여기서 새재까지 높은 봉우리를 서너 개 넘어가야 한다. 백두대간길이 그렇듯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왕등재 습지를 지나면 갑자기 조망은 없고 키 큰 조릿대가 연신 얼굴을 때린다.
길은 험하지 않으나 긴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한 봉우리를 힘들게 오르고 나면 다시 한 봉우리가 앞에 버티고 있다.

오르내림이 끝나고 외고개로 짐작되는 밤머리재 8.3km, 새재마을 2km 이정표가 나타난다.

와고개


  외고개를 지나 도착한 곳이 새재이다. 밤머리재9.2km, 새재마을 0.9km 지점이다.


새재


    큰 잣나무가 여전히 새재에 우뚝 솟아 있다.

  
   나는 넷째로 태어났다. 위에 큰누님, 작은 누님, 형님, 다음으로 넷째로 태어났지만 형이 어릴 때 죽어서 내가 맏이가 되었다.

  큰집 종손은 아니지만 증조부 아래는 종손이다. 그래서 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에 대한 기대가 크셨다.

   집안 내력은 할아버지는 아래로 남동생 한분이 계셨고 여형제(아버지의 고모, 나에게는 왕고모) 한분 이렇게 3남매이셨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셨다.
  
   할아버지의 큰아들(나에게는 큰아버지)은 일제 강점기 때 징집 당하셔서 전사하셨다. 결혼을 하고 징집 당하셨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형님이 계셨지만 장자가 되시고, 나는 형이 있었지만 장자가 되었다.

   후에 들은 예기지만 큰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대구 보병80연대에서 훈련하셨는데 이때 할아버지는 큰어머니를 모시고 큰아버지를 면회하여 후사를 보려고 했으나 외박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내력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가 제일 기뻐하셨다. 할머니 또한 장손이 된 나를 금이야 옥이야 하셨다.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천자문을 훈장님께 배우게 하셨다. 내가 스스로 배우겠다고 했는지 할아버지가 배우라고 하셨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른들이 사랑방에서 공부마치고 나서 따로 배웠는지 그냥 주워들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훈장님은 이웃 동네 사시는데 우리 집
  사랑방에서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을 저녁에 가르치시고 한밤중에 가시거나, 더 늦을 때는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셨다.

   훈장님은 아버지와 동네 분들한테 천자문과 동몽선습 같은 기초 학문정도를 강습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방은 늘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정규 학업의 기회를 놓친 아버지가 국문과 한자를 깨우치기 위해서 훈장을 모셨는데 동네 청년이나 어른들이 같이 공부하게 된 것이다.

  하늘천(天)따지(地)감을현(玄)누를황(黃)
집우(宇)집주(宙)넓을홍(洪)거칠황(荒)
날일(日)달월(月)찰영(盈)기울측(仄)
별진(辰)잘숙(宿)별일열(列)베풀장(張)
찰한(寒)올래(來)더울서(署)갈왕(往)
가을추(秋)거둘수(收)겨울동(冬)저장할장(藏)
윤달윤(閏)남을여(餘)이룰성(成)해세(歲)
가락률(律)음률려(呂)고를조(調)볕양(陽)
구름운(雲)오를등(騰)이를치(致)비우(雨)
이슬로(露)맺을결(結)할위(爲서리상(霜) .....중략
천지현황하며, 우주홍황이라
일월영측이니, 진숙열장하다
한래서왕하니, 추수동장한다.
윤여성세하고, 율려조양이니
운등치우하며, 로결위상이라 ....중략

  하루 일구 네 자를 십구씩 외우고 다음에는 처음부터 이십구, 다음에는 처음부터 삼십구씩을 외어 가는 방식으로 외웠다.

  훈장님은 한번씩 천자문을 처음부터 외워보라고 하시는데 중간에 구절이 생각이 나지 않아 더듬거리면 훈장님이 막힌 구절의 처음 자의 음을 달아주면 이제야 생각나서
  그다음 구절을 소리 내어 외우는 방법으로 천자문을 외웠다. 지금 생각하면 한자쓰기나 뜻을 익히는 것보다 운율을 외웠던 것 같다.
어쩌다 할아버지 앞에서 천자문을 외우면 할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곤 하셨다.
그러나 외우기만 하고 쓰기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나마도 학교 들어가서부터는 천자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훈장님에게 일인당 공량(貢糧)으로 벼 한 말씩을 지고 와서 우리 마당에 내려놓으시면 계량을 하여 훗날 훈장님이 소 달구지에 싣고 가시거나 우리 집에서 팔아 돈을 가져 가셨다.

  초등학교는 집에서 오리 조금 넘는 거리에 있어서 뛰어가면 삼십분, 걸어가면 한시간정도의 거리였다.


   삼거리에서 우측 길을 따르면 오봉리 하산길이다.(10:55분)

  여기서 부터는 비법정 구간이다. 아니 길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산죽이 빼곡하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산죽을 헤치며 발 디딜 곳을 찾아 발을 디디면 빗물을 잔뜩 머금은 진흙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기 일쑤다.

  길은 보이지 않고 리본이나 고로쇠 수액 체취 호스를 따라 내려갈 방향을 짐작할 뿐이다.
이 길은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에 비에 젖은 이끼가 미끄러워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한다.

  계곡의 불어난 물 때문에 등산화에는 물이 들어가 등산화는 무겁고 발을 디딜 때 마다 질퍽거린다.
앞에 문대장이 길을 안내하지만 조금만 떨어져도 높이 자란 산죽 속으로 사라지기 일쑤다.

오봉리 임도 직전



  이런 길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11시 53분) 오봉리 임도를 만난다. 한 시간을 길이 없는 계곡을 내려 왔다. 젖은 바지는 진흙투성이고 등산화는 물이 들어가 질퍽거린다.

오봉리 임도를 만나다


  그렇지만 위험한 계곡을 벗어나 임도를 걸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안심이 된다.
임도를 따라 30여분 걸으니 드디어 오봉리의 잘 지어진 집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산악회 버스가 서있는 곳에 도착한다.
7기에서는 계곡에서 시원한 알탕(온몸을 물에 넣을 수 있는 목욕)을 했지만 오늘은 비를 맞아 알탕은 엄두가 나지 않아 주변에 세워둔 트럭 뒤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산악회 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