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도전

백두대간 제19구간

머투리 2023. 1. 10. 09:26
백두대간 북진종주 19구간
산행일자 2023년 1월 8일(일요일)
산행코스 만수동계곡-피앗재-속리산-문장대-밤티재
도상거리 19.18km
실제거리 19.18km
산행시간 ( 10시간 0분)휴식시간포함

오늘 대간길은 속리산 천왕봉(1,058m)을 올라 속리산의 주능선을 진행하다가 백두대간을 벗어나 있는 문장대를 들렀다가 비 법정 탐방로를 주파하는 것이다. 웅석봉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북진 종주 이후 처음 만나는 화려한 바위산을 오르게 된다. 바위산이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하다. 하지만 바위산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장쾌하고 압도적인 풍광은 직접보지 않으면 말할 수가 없다. 오늘 하루 백두대간 원정대는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속세를 잊을 것이다.
드림산악회 7기 원정대를 태운 버스가 만수동 입구 정자에 도착한 시각은 6시 반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걱정한 것만큼 춥지는 않다. 오늘은 장소가 좁고 어두워 체조 없이 출발한다. 서둘러 등산스틱을 조정하고 장갑과 등산 스패츠를 끼우려고 엎드려 있는 내 앞에 둘러서서 사진을 찍고 문대장의 출발신호가 떨어진다. 겨울 대간산행은 장비를 챙기는 일이 무엇보다 바쁘다. 준비를 마치고 일어서니 대원들은 저 멀리 가고 있다. 서둘러 따라간다. 만수리 마지막 집을 지나니 눈이 쌓여있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찬다.
유난히 밝은 보름달 아래 속리산 천왕봉이 희미하게 위용을 드러낸다. 속리산 천왕봉은 천왕봉이라는 이름답게 사방에서 바라볼 수 있다. 7시에 접속구간 피앗재 표지목에 닿는다. 천왕봉을 향해 왼쪽 등산로로 방향을 튼다. 동쪽에서 붉은 여명이 물들고 있다. 여기서 부터 천왕봉까지 힘든 오르막이 이어진다. 한바탕 된비알이 이어진 후 잠시 휴식하며 윗옷을 벗는다. 더우면 벗고 추우면 입어야 한다. 오늘 산행이 추울 것이란 예상으로 타이즈를 입어 덥다. 덥지만 타이즈를 벗기가 쉽지 않다.

천왕봉 정상의 눈보라

정면에 희뿌연 구름으로 둘러싸인 천왕봉의 위용이 드러난다.
추석에는 우리 집에서는 차례를 지낸다. 차례준비는 추석이 되기 며칠 전부터 한다. 할아버지는 추석 며칠 전 나를 데리고 밤을 따러 가셨다. 뒷산에는 오래된 밤나무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밤이 많이 달렸다. 할아버지는 밤나무에 올라가셔서 장대로 밤을 따시고 나는 밤나무아래에서 밤을 주었다. 밤을 줍는데 정신이 팔려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 보면 밤송이가 내 머리위에 떨어지기도 했는데 몹시 아팠다. 피가 나기도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조심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아래에 내가 있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밤을 따셨다. 밤송이는 볏 가마에 담아 지게에 지고 오셨다. 누나와 동생들은 볏 가마에 들어 있는 밤을 몇 톨씩 까서 먹었다. 밤송이를 발로 밟아 비비면 반질반질한 밤송이가 세 개씩 들어 있었다.
추석날 아침에는 일찍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였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 오신 옷을 입고 큰집으로 갔다. 큰집과 중간 집인 우리 집과, 작은 집에서 각각 제사를 지내는데 큰집부터 차례로 제사를 지낸다. 큰집에 가면 모두 제사음식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큰 집에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 친척도 있었는데 내가 가면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혀졌다. 친척 아이들은 큰집 아제가 사과를 깎으면 사과 껍질을 얻어먹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껍질이 떨어지면 잽싸게 집어서 먹는 맛은 아직 잊히지 않는다. 지루한 제사가 끝나면 방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전과 생선, 돔배기를 곁들여 소고깃국에 제삿밥을 말아서 한 그릇이 먹는다. 어른들은 제사에 관한 예기만 하셨다. 음복이 끝나면 큰집에서 제사지냈던 친척과 아이들은 중간집인 우리 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왔다. 우리 집에서는 큰집에서와 같이 과일 껍질을 얻어먹기 위해 아이들이 모이지 않았다. 제사가 끝나면 큰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종 전과 생선, 돔배기를 곁들여 소고깃국에 제삿밥을 말아서 한 그릇을 먹는다. 우리 집에서 음복이 끝나면 작은집으로 모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똑같이 소고깃국에 제삿밥을 말아 한 그릇을 먹는다. 이렇게 세집을 돌고나면 나는 배가 불러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제사가 끝나면 산소에 성묘를 가야했다.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과 함께 가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지붕에서 떨어지시고 난후부터 성묘는 내차지가 되었다. 동생들은 모두 성묘를 가기 싫어서 어디론가 가버리면 나 혼자 성묘를 가야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산소는 각각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성묘 음식을 따로따로 네 개의 찬합에 담아 정종 한 병과 함께 보자기에 싸 주셨다. 집에서 한 시간 가까이를 걸어 증조할머니 산소에 도착하여 먼저 향을 피운 후 어머니가 싸주신 증조할머니 성묘음식이 담긴 찬합을 산소 상석위에 올리고 술을 따라 올리고 재배를 한다. 이렇게 성묘를 마친 후 차렸던 성묘음식을 안주삼아 술을 음복한다. 그리고 한 시간씩을 걸어 차례로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 후에 음복하고 나면 오후 두세 시가 되어서야 성묘를 다 마치게 되는데 정종을 거의 반병이상 비워지도록 음복을 한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오곤 했다,

겨울이면 남자(어린남자, 청년)들은 산에 가서 깔비를 한 지게씩 해오고 나서야 다른 볼일을 볼 수 있었다. 땔감을 산에서 해오기 때문에 산들은 대부분 민둥산이었다. 땔감이 귀해도 소나무는 베지 못했다. 산 주인이 소나무는 베어가지 못하게 했다. 산주인은 소나무가 무성해지면 삼판(소나무 가지를 자르는 것)을 해 와서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소나무 아래는 깔비(솔가리의 방언,솔잎)가 떨어지는데 깔비를 땔감으로 쓰면 깔비는 송진이 있기 때문에 화력이 좋다. 어쩌다가 한 번씩 나무하러 가면 이미 깔비를 긁어간 데는 깔비가 없어서 온산을 헤매다가 빈 지게를 지고 집에 오기도 하였다. 나무하러 갈 때는 어디에 깔비가 있을지 정보를 미리 알고 가야한다. 어떤 때는 억새풀을 미는 낫(낫의 날을 낫의 등 쪽에 만들어 양쪽에 낫날이 있는 것)으로 억새풀이나 잡풀을 밀어서 베어 갈고리로 긁어모아 땔감으로 쓰는 것이다. 이런 억새풀은 근방 타 없어지기 때문에 갈비보다 못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집집마다 나무를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소나무가 있는 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산은 민둥산일수 밖에 없다. 정부에서는 산에 갈비를 긁어 땔감으로 쓰면 비가 올 때 빗물을 가둘 수 없어서 홍수의 원인 된다고 깔비로 땔감을 쓰는 것을 막고 있었다. 면사무소 산림계나 순경은 깔비가 집에 있는지 단속하러 다니기도 했다. 집에 해놓은 깔비(솔가리)가 적발되면 벌금을 부과하기 위해서 면사무소나 파출소에 데려 갔는데 마을사람들은 데려 가는 것을 “잡혀 간다”고 했다. 그래서 단속이 나오면 갈비를 덮거나 창고에 넣어 잠그고 집을 비워 단속을 피하기도 했다.
새하얀 눈 위에 고개를 내민 산죽이 무리지어 우리 백두대간의 원정대를 소리 내어 응원한다.
가파른 오르막은 우리 원정대를 겁박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걷는다. 하지만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선두 팀은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괜찮다 멈추지 않으면 된다. 이번 구간에는 늘 선두에서 걷던 용표님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지만 용표님은 나의 느린 걸음에 갑갑했을 것이다.
숨을 턱까지 차오르게 하더니 마침내 속리산의 주봉 천왕봉(天王峰)의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속리산은 신라선덕왕 5년(784년)에 진표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을 본 농부들이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속리(俗離)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천봉에서 바라본 산줄기의 실루엣


남쪽으로 백두대간의 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새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산의 실루엣은 단순하면서도 장쾌하다.
거기다가 새하얀 상고대(나무나 풀에 내려앉은 눈처럼 된 서리)와 어우러진 속리산 천왕봉은 우리가 백두대간을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산님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곳곳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리도 질세라 저마다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남긴다.

아름다운 속리산 천왕봉 정상석
천왕봉 정상에서


문장대로 가는 길은 기암의 전시장이다.
“비노자나불“ 즉 ”모든 곳을 두루 비친다“라는 뜻의 비로봉(毘盧峰)을 만난다.
속리산의 주릉은 화강암과 침식한 퇴적암이 골짜기를 만들어 절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속리산의 우뚝 솟은 주릉은 멀리서도 장쾌하게 여기가 속리산임을 알린다.

석문
고릴라 바위


문장대로 가는 길은 걸출한 바위들이 곳곳에서 위용을 드러낸다. 입석대(立石臺), 임경업장군의 전설이 깃든 경업대(慶業臺), 그리고 신선대(神仙臺)삼거리를 지나 청법대와 문수봉(文殊峰)을 지나면 속리산의 마지막 봉우리 문장대(文藏臺)에 닿는다. 문장대 앞에는 7형제봉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기암들의 아름다움에 취해 걸으니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신선대 휴게소이다. 국립공원의 주능선에서 막걸리를 판매하는 유일한 곳이다. 국립공원 지정이전부터 임대를 받아 영업해온 신선대휴게소는 아직도 영업을 해오고 있다. 산 꾼들은 이런 곳이 있어 색다른 추억과 먹을거리로 반갑다. 오늘은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기위해서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 등산객들로 가득한 신선대휴게소에서 컵라면에 감자전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막걸리도 팔지만 오늘의 대장정을 위해서 막걸리를 주문하지 않았다. 지갑을 들고 있는 나를 제지하며 용표님이 계산을 한다.

신선대 휴게소

신선대휴게소를 나서며 용표님이 오늘 산행 중 난코스인 문장대-밤티재 구간을 같이 가자고 슬쩍 말을 꺼낸다. 혼자서는 가기 힘든 구간을 같이 해주겠다는 용표님의 제의에 흔쾌히 응한다. 그러나 걸음이 느린 내가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바위계단을 올라서자 문장대가 선물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아득한 산줄기의 실루엣이 문장대를 에워싸고 엎드려 있다. 문장대 정상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화북분소 갈림길에서 잠시 백두대간을 벗어나 있는 문장대 표지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서둘러 내려오니 화북분소 갈림길에 7기 대원 한분이 기다린다. 합류하여 화북분소 내리막길을 10분여 내려가다가 잘 닦여진 등산로를 버리고 왼쪽으로 비정탐방로로 방향을 튼다.

문장대

여기서 국공(국립공원관리공단)직원들의 감시망을 피해 우리 7기 선두대원들의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진행한다.
선두대원이 러셀(Russell: 등산로에서 선두에 서서 눈을 다져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는 일)을 해놓았다고는 하나 눈이 쌓인 비 법정 탐방로는 눈에 발이 푹푹 빠져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고 걷기도 힘이 든다. 감시 카메라는 문장대 조금 지난 지점과, 밤티재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고는 하나 우회로로 왔는지 볼 수 없었다. 잠시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자 큰 바위 절벽이 버티고 있다. 산꾼 용표님이 선두에서 발 디디는 방법과 몸을 지탱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내려간다. 하지만 바위틈으로 드러난 낭떠러지 위에 줄을 잡기는 했으나 뒤로 내려서기란 오금이 저려온다. 양쪽 바위에 손으로 지탱하고 미끄러운 바위에 올라서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해서 내려온다. 도저히 내려가지 못할 것 같은 암벽을 내려왔다. 올려다보니 아찔하다. 여기서 시작된 암벽은 암벽을 오르기도 하고 내려서기도 하는 데 암벽의 모양이 각기 다르다. 따라서 내려서는 방법도 다르다. 험한 암벽을 어렵게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모습의 암벽이 나타난다. 줄을 잡고 내려오다가 몸을 비틀어야 지날 수 있는 암벽이 있는가 하면 배낭과 스틱을 던지고 몸만 지탱하며 내려오는 구간도 있다. 밧줄이 미끄러워 맨손으로 내려오는 구간이 있는가하면 발을 디딜 곳이 없어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날려야 내려올 수 있는 구간도 있다. 눈이 쌓여 있지만 춥지 않아 다행이다. 더 춥다면 바위의 물기가 얼어붙어 아이젠도 쓸모가 없을 것 같다. 눈이 쌓인 좁은 바위틈을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작은 눈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등산 스틱 한 짝을 찾을 수가 없다. 다시 위험한 바위틈을 올라가서 눈을 헤쳐보지만 스틱은 보이지 않는다. 나의 백두대간 길을 같이 했던 스틱 한 짝을 잃어버려 아쉽지만 위험한 구간을 무사히 내려온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위험한 암벽 구간을 10여개를 지나고 나서야 암벽구간이 끝이 난다. 그렇지만 비 법정 탐방로이기 때문에 이정표도 없고 등산로는 희미하여 발을 헛디디기 일쑤다.



바위를 기대며 내려온다

암벽구간

등산스틱을 잃어버리다
좁은 바위틈을 몸을 비틀어 통과한다
몸을 바짝 업드려 비틀어야 통과할 수 있다
잘못하면 모이 바위 밖으로 나 뒹군다

암벽구간이 끝이 나자 용표님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절개지가 나타나고 도로가 나타난다. 밤티재이다. 도로를 따라 철책이 길게 쳐져있다. 철책을 따라 한참을 내려오고 나서야 철책이 끝이 난다. 도로를 따라 30여분 걸어 드림산악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장암2리 마을 회관에서 대간길을 마감한다. 이곳 장암2리 마을회관의 정자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적혀있는 비가 하나 외롭게 서 있다. 마을의 한 청년은 경찰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 때 전사하였다. 안타까운 자식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던 아버지가 마을회관 건립된 땅을 기증하여 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린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회관은 백두대간의 쉼터로도 자주 제공된다고 한다. 장암2리 마을회관 마당에서 하산주와 떡국을 먹고 버스에 오른다. 용표님은 혼자 밤티재-늘재-장암2리 마을회관을 1시간 30분이 더 걸려 기다리고 있는 대원들의 박수 속에 밝은 모습으로 도착한다. 나이를 무색할 만큼의 용표님의 용기와 도전은 놀랍고 존경스럽다.

'백두대간도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제21구간  (0) 2023.02.13
백두대간 제20구간  (0) 2023.01.30
백두대간 제18구간  (0) 2022.12.26
백두대간 제17구간  (0) 2022.12.12
백두대간 제16구간  (0) 2022.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