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장군바위에 새겨진 마애상

머투리 2025. 2. 28. 21:05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2.5km리길을 걸어서 다녔다. 지금은 걸어 다니기가 조금 먼 거리이지만 그때는 다른 동네 아이들 보다는 등굣길이 가까운 편이었다.
 
  학교는 개울을 두세 개 건너야만 갈수 있었다. 겨울에는 개울물이 적게 흘러서 징검다리로 건너 다닐 수 있었지만 봄이 되고나면 얼었던 물이 녹아 제법 많은 물이 흘렀기 때문에 개울의 폭이 좁은 쪽으로 가서 뛰어서 건너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신발을 벗고 개울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이른 봄에는 얼음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이라 몹시 차가웠다.
 
  맨발로 개울물을 건널 때는 발이 시려 종종 걸음으로 개울을 건너곤 했었다.

  봄이 지나고 장마철이 오면 개울은 사나운 기세로 흙탕물을 이뤄 흘렀는데 고학년은 위험을 무릅쓰고 개울을 건넜지만 저학년 학생들은 개울물을 건너지 못하여 학교에 가지 못했다.

  봄이 되면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는데 기성회비다.

  아침에 등교할 때 기성회비 달라고 엄마한테 말씀드리면 집에서 내쫓았는데 그래도 몇 번 달라고 하다가 어머니가 완강하게 내쫓으면 집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매일 기성회비를 못낸 학생들을 호명하여 교실 앞으로 불러내어 언제까지 가져 오겠느냐며 다그치셨다. 나는 적당히 언제 내겠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기성회비를 낼 날짜는 부모님이 날짜를 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적당히 선생님께 둘러댄 것뿐이었다.

  선생님과 약속한 그 날짜가 되어 어머니께 기성회비를 내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그때도 집에는 돈은 없었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돈을 빌리지 않으면 회비를 낼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날도 마찬가지로 나를 학교로 내쫓는 방법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머니와 한바탕 씨름을 했기 때문에 학교 가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기 일쑤였다.

  나는 뛰어가기도 하고, 죄 없는 돌을 발로 차기도 하며 가기 싫은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학교에 거의 가까워지면 길옆에 동산이 하나 있었다. 어른들은 그 작은 동산을 창덤이라고 불렀다.

숯덤의 물웅덩이

  동산 아래는 깊은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물이 많을 때도 있고 바닥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동산이다.
학교가 멀리보이기 시작하면 담임선생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학교에 갈수가 없었다.

  나는 동산에 무작정 올라갔다. 동산에는 장군 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 바위주변은 풀이나 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 바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바위아래서 바위에 기대앉거나 했다. 동산에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학교 가지 않는다고 머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 장군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꺼내 공부하거나, 작은 나무 막대기로 이리저리 그림을 그려보거나 죄 없는 작은 돌멩이를 던지며 시간을 보내다가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하나둘 나올 때 비로소 나도 아이들 틈에 끼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 장군바위는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을 만들 때 경관을 빼어나게 하려고, 전국에서 가장 잘생긴 바위들을 모두 금강산으로 모이게 하였는데 이 고을에 힘센 장군이 이 장군 바위를 몰고 가다가 금강산에 이미 일만 이천 봉의 봉우리가 다 만들어 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 장군 바위를 지금의 위치에 뒀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삼창 시장에 가거나 버스를 타기위해 삼창으로 갈 때 어른들로 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퇴직 후 그 장군 바위를 보려고 몇 번이나 벼르다가 이번에야 친구인 삼창리 이장 조신환 친구와 월곡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화백과 함께 작은 동산에 올라 보았다.
아마도 나로서는 사오십 년 만에 가보는 답사이다.

네모안이 장군바위

   잡목과 마른 풀을 헤치고 올라가 보니 장군바위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옛날에는 바위가 눕혀져 있어 바위에 올라가 앉아 책도 보고 돌팔매도 했지만 지금은 시멘트 받침대 세워져 있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그 장군바위 전면에는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데 마애부처상인지, 장군바위의 뜻 그대로 장군상(마애장군상) 인지는 알 수가 없다.

  뒷면과 옆면에 아무 표식이 없어 조각연대나 마애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장군바위 옆면
장군바위 마애상

   삼창리 이장인 친구는 옛날부터 마애상이 새겨져 있었으며 몇 년 전에 도난 당할 뻔했다고도 했다.

  추측컨대 이 동산의 건너(삼창3리:한천)에 임진왜란당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한천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승리한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가 있어서 의병에 참여한 장군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에 마애장군상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뿐이다.

임란의병한천전승탑

  이 장군상의 역사적 가치나 문화유전으로써의 가치는 비전문가인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루 빨리 역사적 고증이나 유물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 지기 바란다.
 

현고서당
임계정

  장군바위 옆에 임계정(林溪亭)이라고 쓰인 제실과 현고서당(賢皐書堂)이라고 쓰인 서당이 있다. 제실과 서당은 대나무 숲에 가려져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옛날 추억의 장군바위를 찾았는데 뜻 밖에도
그때는 못 보았던 마애장군상을 발견하고 동산의 장군상을 찾아온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